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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사실주의

난자기 2016. 2. 20. 10:40


‘이럴 거면 사진을 찍지 뭐하러 그림을 그리나?’하고 묻게 되는 미술사조가 있습니다.
하이퍼리얼리즘이라고도 불리는 극사실주의입니다.
현재 전시 중인 작품 먼저 보겠습니다.

디에고 코이作, ‘반사’ (종이에 연필)

디에고 코이作, ‘반사’ (부분)

아무리 봐도 사진 같습니다. 연필로만 그린 겁니다. 이렇게 그리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들었을까요. 조소작품 보겠습니다.

마크 시전作, ‘포옹’ (레진에 유채)

마크 시전作 ‘포옹’ (부분)


작가 자신과 아내를 묘사한 작품입니다. 오랜 세월 쌓인 노부부의 감정이 주름 한 줄, 털끝 한 올마다 배어있습니다. 실제와 똑같은 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기계의 힘을 빌릴 수 있는데 왜 이렇게 할까요. 기계가 만든 복제품과 예술품은 뭐가 다르다는 걸까요.

가장 큰 차이는 ‘시간’에 있습니다. 사진이라면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포착됐을 장면, 기계라면 길어야 몇 시간이면 찍어낼 수 있는 모양을 만들어내느라 작가는 몇 달, 몇 년을 들였을 터입니다. 한 여성의 마음에 사무친 감정, 아내를 그리는 애틋한 마음을 기나긴 작업과정에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것이 복제품과 미술품의 우선적인 차이입니다. 세월에 찰나를 담습니다. 이를 보는 관객의 시간도 잠시 멈춰 섭니다.

기계의 복제는 어떤가요. 우리는 지금 수백 명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낸 영화 한 편을 몇 초 안에 다운로드받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기까지 시나리오를 쓰고 기획과 촬영을 거쳐 개봉하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그 복제 과정이 허무하기까지 합니다.

이제는 신체 기관까지 3D프린터로 ‘다운로드’하는 세상이 됐습니다. 지구 저편에서 설계한 디지털 파일을 다운받은 다음 3D프린터에 입력하면 원하는 물건이 출력됩니다. 대량생산·대량복제가 디지털화하면서 시공간의 개념조차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극사실주의 작품을 보는 관객 입장으로 돌아와봅니다. 이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며 눈이 커진 관객의 궁금증은 곧 작품 속 인물의 마음은 어떤 걸까 하는 질문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천천히 오래 들여다볼 때 가능한 질문입니다. 극사실주의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술을 잘 모르는 관객도 조금 더 긴 시간을 들여 바라보게 되고 그렇게 작품의 내면으로 들어가면서, 어려운 현대미술의 문턱도 조금은 쉽게 넘을 수 있습니다.

극사실주의 작품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명하다는 전시회나 대형 미술관을 찾아 수십, 수백 점의 작품을 다 보겠다고 걸음을 재촉한 적 있으신가요? 그렇게 두어 시간 만에 전시장을 나섰을 때, 가슴에 남는 작품이 있었나요?

미술에 다가서려면 전시장에 걸린 수 많은 작품에 죄다 눈도장을 찍겠다는 욕심부터 버리는 편이 좋습니다. 전시장을 둘러보다 이거다 싶은 작품이 나오면 남은 시간을 모조리 투자하는 겁니다. 구석구석 뚫어져라 노려보는 것이 작품과 안면을 트고 대화하는 첫걸음입니다.

작품과 인사를 나눴으니 좀 더 풍성한 대화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극사실주의는 1960년대에 태동했습니다. 팝아트와 탄생 시기나 배경이 비슷합니다.

때는 전후 미국 베이비붐 세대가 대중문화 소비층으로 성장하면서 호황이 시작된 시기였습니다. TV가 대중문화의 절대 강자로 자리 잡고 할리우드도 나름의 생존 전략을 구축하면서 영상문화가 시대를 압도합니다. 한편으로는 청년들의 저항문화가 들끓으면서 기존 가치에 대한 전복이 줄기차게 모색되기도 한 시기였습니다. 팝아트는 이런 시대적 배경을 안고 태어납니다.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의 작품 보겠습니다.

앤디 워홀作, ‘캠벨 수프 캔’

현실에 있는 물건을 그대로 화폭에 가져온 것뿐 아니라, 슈퍼마켓에 진열된 상품 이미지를 고스란히 옮겨왔습니다. 대량생산·대량복제 시대를 성찰하며 미술의 개념을 뒤집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반복 속에 미세하게 드러나는 균열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역시나 당대의 풍경과 만날 수 있습니다. 3월 1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현대미술 전시회 ‘피카소에서 프랜시스 베이컨까지’ 전에서는 앤디 워홀 등 팝아트 작품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팝아트와 극사실주의가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데는 이런 시대적 맥락이 있습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대량생산 체제가 밀려온 20세기 초. 즉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똑같은 제품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면서 산업 구도가 재편됩니다.

마르셀 뒤샹(1887~1968)은 1917년 뉴욕의 미술 전시장에 화장실 소변기를 갖다놓습니다. 시중에서 파는 변기를 사다 한쪽에 글자만 써놓았을 뿐인데, '레디메이드’라는 새로운 경향을 만들며 20세기 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으로 꼽히게 됩니다. 앤디 워홀 스스로 뒤샹을 직접 계승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대량생산·대량복제 시대에 대한 고민은 지난 100여년 간 현대미술의 화두이자 창작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마르셀 뒤샹作, ‘샘’

1970년대 경제 부흥기를 맞은 일본 미술이 판화에 주목한 배경도 궤를 같이합니다. 무한 복제가 가능한 영상매체가 문화 전반을 장악한 시기, 가장 원초적인 인쇄매체인 판화로 돌아간 겁니다. 당시 일본 작가들은 사진의 이미지를 겹치고 반복시키며 실크스크린으로 등사하면서 새로운 판화 형식을 만들어냈고 국제무대에서 잇따라 수상하면서 서양 현대미술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국내에선 처음으로 70년대 일본 판화를 조명하는 전시회도 열리고 있습니다. 극사실주의가 연상되는 작품도 많고 팝아트가 떠오르는 것도 여럿 만나볼 수 있습니다. 동시대 도시 풍경이나 뉴미디어를 돌아보는 판화작가들의 시선은 적잖이 현실 참여적입니다.

요시다 카츠로作, ‘Work 10’ (실크스크린)


‘복제’와 관련된 문제는 지금 어느 예술 분야든 커다란 화두입니다. 좀 더 근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모든 생명은 복제하는 존재입니다. 생명체의 기본 단위인 세포가 자신을 복제하면서 성장하고 종(種)을 유지하는 것이 생명 활동입니다. 약 38억 년 전 혼돈의 지구에 알 수 없는 우연으로 하나의 세포가 탄생한 이래, 생명체는 자기 복제를 통해 번식하고 진화해왔습니다. 자신을 복제할 수 없으면 생물이 아닙니다. 이어 다세포 생물이 탄생하고, 좀 더 복잡한 분열을 거쳐 수많은 동식물이 출현했습니다.

인류는 약 600만 년 전에 등장했습니다. 생명체가 자기복제를 해온 시간이 아득합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밈’(meme)이라는 독특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것이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의 이론입니다.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과학자’를 설문 조사하면 매년 10위 안에 빠지지 않는 인물이죠.

밈 이론의 핵심은 사회의 관습이나 문화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 사이에 모방·복제·전승되는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밈으로 인해 인간은 국가나 종교, 신념 등을 다른 사람의 뇌로 복제하며 다음 세대에 물려줍니다.

최근 <사피엔스>를 써 세계적 지성으로 떠오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농업혁명(약 1만 2천 년 전) 이전의 인간이 뇌에서 뇌로 관념 체계를 전파해온 것을 인류 역사의 첫 번째 혁명, ‘인지 혁명’이라고 칭합니다. 약 7만 년 전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얘기입니다. 인간은 복제하는 존재입니다.

현대 예술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수백만 년 동안 인류가 이어온 생명의 복제와 길어야 수백 년도 안 되는 기간에 갑자기 진행된 기술복제 사이에서 겪는 혼란입니다. 특히 미술이나 영화 등 시각예술 분야에서 이런 걱정과 고뇌가 깊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처럼 기술복제 시대 인간 존재의 근본을 사유한 작품도 많습니다.

기술복제 시대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진 영화 ‘A.I.’

생명체의 복제는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쉽게 이뤄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초콜릿 복근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하더라도, 통증을 느끼기 전까지는 단 한 개의 근육세포도 복제시키지 못합니다. 하물며 한 생명이 잉태돼 성장하기까지 유전자정보가 전달되고 세포가 분열하는 과정에서 경쟁과 고통의 시간이 쌓이고 또 쌓여야 함은 물론입니다.

앞으로 생명의 시간은 기술의 시간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현대 예술은 오늘도 ‘오래된 미래’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송형국기자 (spianato@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