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개자추 본문
진문공은 귀국한 뒤 먼저 논공행상을 시작했다. 공평하게 논공행상을 했지만 사람들인지라 간혹 불만이 생겼고 이를 엄하게 다스리기 보단
문공은 그들을 달래며 단결력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논공을 원하며 궁에 들락날락 하는 자들과 달리 개자추는 그러지 않았다. 수십명을 달래고 논공을 행하다 보니 진문공도 그만
개자추에게 내릴 상을 잊어버린 것이였다.
개자추는 곧 장 집으로 와서
"어머님, 주군의 대업이 성공했습니다. 허나 녹봉을 바라는 저런 속물들과는 같이 대사를 함께할 수 없으니 여생을 산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모실까
합니다." 라고 밝혔다.
개자추의 어머니도 큰 인물이였다. 역시 내 아들이라면서 충정을 행했으니 너의 임무는 끝났다 앞으로 편하게 지내자 라며 흔쾌히 산으로 향했다.
진문공은 후에 이 일을 알고는 중신들을 모두 동원해 개자추를 찾으러 갔다. 논공행상과 더불어 문공은 나라를 재정비 하느라 바쁜 상황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을 비우고 중신들을 대동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미안했으리라 라고 유추할 수 있다.
개자추_kai011x.jpg [춘추시대] 고진감래, 패자 진문공(晉文公)⑥ (브금)
몇일간 온 산을 뒤져 개자추를 찾았다. 진문공은 간곡히 설득했으나 그는 두문불출 하여 다른산으로 옮겨가곤 했다.
이에 호언과 조최등은 불을 지르면 별 수 없이 개자추가 나올 것이라 말했고 이에 진문공은 실행한다.
몇일이 지나 온 산이 다 불타올랐지만 개자추 모자는 끝내 시신으로 발견 되었다.
진문공은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에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고 그를 기리기 위해 개자추의 기일날에는 불을 떼지 말라고 명했으니 이것이 한식[寒食]의
유래다.
개자추가 허벅다리살을 올려 바친것을 두고
股肱之臣 [ 고굉지신 ] 사자성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또한 개자추 모녀가 죽기전 붙잡고 있었던
타다남은 버드나무를 문공은 신발로 만들어 족하(足下)라 부르며 간혹 그의 생각에 눈물을 지었고 이것이 현재 우리가 부르는 ‘조카’ 의 유래라는
설도 있다.
개자추의 이러한 행동에 현대 동양 심리학자들은 ‘개자추 컴플랙스’ 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신에게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에게 관심을 사기위해
신체를 훼손하거나 비정상적 행동을 하는 것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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