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이문재 산문집(도서출판 호미, 20006년) 중에서 본문
... 아버지의 유전자는 전적으로 조선 왕조의 유전자였다. 농경 공동체 문화, 가부장적 문화, 남성 중심적 문화를 그대로 전수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마지막 아버지였다. 물려받은 대로, 물려줄 수 있었던 아버지.
그러고 보니, 나는 마지막 아들이자, 최초의 아버지다. 나는 마지막 아버지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은 마지막 아들이지만, 물려받은 것을 내 아들딸에게 물려줄 수 없는 최초의 아버지이다. 이 사태는 매우 분열증적이다. 아버지는 족보로부터 시작해 관혼상제 일체를 고스란히 내게 전수했지만, 나는 그것을 사용할 수 없었다.
차례와 제사가 아파트로 들어가고, 돌잔치나 결혼식, 이제는 장례식까지 ‘서비스 업체’가 도맡는다. 특히, 내게는 아버지가 누렸던 권위가 없다. 나는 아내에게 꼼짝 못하는 좀스런 남편이고, 아들 딸의 핀잔 앞에 속수무책인 허약한 가장이다. (중략) 가족은 더는 가족이 아니었다. 가족 구성원은 ‘산업 전사’일 따름이었다. (중략)
뒤늦게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 내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분만실 앞에서 나는 손을 꼽고 있었다. 둘째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러니까 앞으로 이십오 년을 더 벌어야 하는구나, 육십대 중반까지 죽어라고 일을 해야 하는구나, 하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중략)
푸른 빛을 띠던 아버지 손등의 힘줄이 눈에 선하다. 늘 수염에 가려져 있던 입술 왼쪽의 작은 혹도 떠오른다. 큰 코에 유난히 깊고 그윽하던 눈매며, 지포 라이터에서 나던 휘발유 냄새도 또렷하다. 내 두 아이들은 나에게서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나는 두 아이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물려받았지만 물려줄 것이 별로 없는 최초의 아버지는 고단하고 외롭다 ...
- 이문재 산문집(도서출판 호미, 20006년) 중에서 -
(Canon EOS D60 / Tmron 17-35mm / 대구 내당동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방인이 바라본 이방인 / 작당이 (0) | 2016.08.22 |
---|---|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 이상 (0) | 2016.08.01 |
관조냐 참여냐 / 박작당 (0) | 2016.04.27 |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 사뮈엘 베케트 (0) | 2016.03.06 |
상춘곡 / 윤대녕 (0) | 2016.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