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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곡 / 윤대녕

난자기 2016. 3. 2. 16:50


벚꽃이 피기를 기다리다 문득 당신께 편지 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오래전부터 나는 당신께 한번쯤 소리나는 대로 편지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막걸리 먹고 취한 사내의 육자배기 가락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내게 무슨 깊은 한이 있어 그런 소리가 나오겠습니까?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매양 또 주저하다 세월만 흘려보낼 것 같아 딴에는 작정을 하고 쓰는 셈입니다.

열흘 전, 실로 칠 년 만에 당신과 해후했을 때 당신은 내게 벚꽃 얘기를 하셨습니다.

4월 말쯤 벚꽃이 피면 그때 다시 만나자고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남南으로 내려가 벚꽃을 몰고 등고선을 따라 죽 북향할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개화 남쪽 지점을 당신의 고향으로 정한 겁니다.

이곳 선운사는 십 년 전에 우리가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이 아닙니까.

아주 오랜만에 써보는 편지니 군데군데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나더라도 행여 접지 말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벚꽃이 피는 날까지 천천히 써나갈 생각입니다.
실은 엊그제부터 쓰고자 했는데, 말문이 트이지 않아 얼굴을 납작하게 종이에 댄 채 하냥 풀 먹는 짐승처럼 코만 킁킁거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요?
누가 나처럼
선운사로 벚꽃을 보러 내려오겠습니까.
물론 그것만 보자고 내려온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이곳은 내게
여러 겹의 인연이 겹쳐진 곳이니까요.
사람은 우연히 지나친 길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다시 그 길을 지나게 되나봅니다.

석상암엔 그날 아무도 없었습니다.
스님은 외출하고 보살님 한 분만이 산신각에 앉아 향을 사르고 있었지요.
그 산신각 앞에 물에 젖은 수선화 몇 송이가 향내를 맡으며 샛노랗게 피어 있더군요.

아름답더군요.

이제 나도 꽃을 보면 왜 꽃이 아름다운가를 조금은 알 듯합니다.
함부로 지껄일 얘기는 아니지만 나도 한 겹씩 한 겹씩 마음이 털어내지는 걸까요?
그러면서 비로소 사물이 스며들 틈이 조금씩 생기는 걸까요?

벚꽃은 당최 필 생각을 않고 내려올 때와는 달리 마음이 흐려져 도대체 내가 들여다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어쩐지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여 내심 두렵습니다.
무엇 때문에 나는 여기 내려와 이러고 있는 것입니까?

우린 진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달은 지 이미 오랩니다.
그것은 한편 목숨의 다른 이름일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아무때나, 아무 곳에서나,아무한테나 함부로 그것을 들이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것은 자주 위험한 무기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여기 와서 알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멀리서 얘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들이 된 것입니다.

오늘 벚나뭇길에서 보니 며칠 안짝이면 꽃망울이 터질 듯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처럼 꽃을 보러 온 이를 만나 만세루 얘기를 들은 것은 참으로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그날 내가 보았듯이, 벚꽃도 불탄 검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게 더욱 희고 눈부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그게 당장일 리는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추신

아, 그리고 인옥이 형이 그날 당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나 오늘 벚나뭇길 좌판의 어떤 아주머니한테서 동백기름 한 병을 샀습니다.
나중 어느 날이라도 생각이 변하고 마음이 바뀌면 머리에 한번 발라보라고 말입니다.

당신 앞산에 벚꽃이 피면 그때 찾아가서 놓고 오지요.

- 윤대녕, <상춘곡>중에서





신윤복 연소답청(年少踏靑)


홍진(紅塵)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生涯) 엇더한고.
     ( 속세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이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가? )


녯 사람 풍류(風流)를 미칠가 못 미칠까.
     ( 옛 사람의 풍류(멋)를 따르겠는가, 못 따를까 )


천지간(天地間) 남자(男子) 몸이 날 만한 이 하건마는,
     ( 세상의 남자로 태어난 몸으로 나만한 사람이 많지마는 )


산림(山林)에 뭇쳐 이셔 지락(至樂)을 마랄 것가.
     ( 산림에 묻혀 있는 지극한 즐거움을 모른단 말인가 )


..중략


떠오나니 도화(桃花)ㅣ로다.
     ( 떠내려 오는 것이 복숭아꽃이로구나. )


무릉(武陵)이 갓갑도다, 져 메이 긘 거인고.
     ( 무릉도원이 가깝구나, 저 들이 무릉도원인가 ? )


송간(松間) 세로(細路)에 두견화를 부치 들고,
     (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에서 진달래꽃을 붙들고 )


봉두(峰頭)에 급피 올나 구름 소긔 안자 보니,
     ( 산봉우리 위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보니 )


천촌만락(千村萬落)이 곳곳이 버려 잇네.
     ( 수많은 촌락이 여기저기 널려 있네. )


연하일휘(煙霞日輝)는 금수(錦繡)를 재폇는 듯,
     ( 안개와 노을과 빛나는 햇살은 수놓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구나 )


엊그제 검은 들이 봄빗도 유여할샤.
     ( 엊그제까지 거뭇거뭇하던 들판에 봄빛이 넘쳐 흐르는구나. )


공명(功名)도 날 끠우고, 부귀(富貴)도 날 끠우니,
     ( 공리와 명예도 나를 꺼리고, 부귀도 나를 꺼리니 )


청풍명월(淸風明月) 외(外)예 엇던 벗이 잇사올고.
     (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외에 그 어떤 벗이 있겠는가 )


단표누항(簞瓢陋巷)에 흣튼 혜음 아니하네.
     ( 누추한 곳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헛된 생각을 아니 하네. )


아모타, 백년행락(百年行樂)이 이만한들 엇지하리.
     ( 아무튼 한평생 즐겁게 지내는 일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겠는가? )


상춘곡(賞春曲)  / 정극인(丁克仁:1401~81, 조선성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