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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모든 희망을

난자기 2016. 10. 6. 16:28

저녁은 모든 희망을


바깥은 문제야 하지만

안이 더 문제야 보이지도 않아

병들지 않으면 낫지도 못해

그는 병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전력을 다해

가만히 멈춰 있기죠

그는 병들었다, 하지만

나는 왜 병이 좋은가

왜 나는 내 품에 안겨 있나

그는 버르적댄다

습관적으로 입을 벌린다

침이 흐른다

혁명이 필요하다 이 스물 네 평에

냉혹하고 파격적인 무갈등의 하루가,

어떤 기적이 필요하다

물론 나에겐 죄가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벌 받고 있지 않은가, 그는

묻는다, 그것이 벌인 줄도 모르고

변혁에 대한 갈망으로 불탄다

새날이 와야 한다

나는 모든 자폭을 옹호한다

나는 재앙이 필요하다

나는 천재지변을 기다린다

나는 내가 필요하다

짧은 아침이 지나가고,

긴 오후가 기울고

죽일 듯이 저녁이 온다

빛을 다 썼는데도 빛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안 된다

저녁은 모든 희망을 치료해준다

그는 힘없이 낫는다

나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는 무장봉기를 꿈꾸지 않는다

대홍수가 나지 않아도,

메뚜기 떼가 새까많게 하늘을

덮지 않아도 좋다

나는 안락하게 죽었다

나는 내가 좋다

그는 돼지머리처럼 흐뭇하게 웃는다

소주와, 꿈 없는 잠

소주와 꿈 없는 잠

[출처: 중앙일보] [2011 황순원문학상] 시인 이영광





◆이영광 시인=1965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안동에서 자랐다. 고려대 영문과 졸업. 같은 대학 국문과에서 미당(未堂)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98년 계간지 문예중앙에 ‘빙폭’ 등 9편이 당선돼 등단했다. 『직선 위에서 떨다』『그늘과 사귀다』『아픈 천국』 등 세 권의 시집을 냈다. 지난 5월에 청록파 시인 조지훈을 기리는 11회 지훈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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