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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으로 죽 끓이기 / 이향지 본문

밥으로 죽 끓이기 / 이향지

난자기 2017. 3. 17. 17:04

물은
변경에서부터 끓기 시작했다
말간 거품들이
가장자리에서부터 떠올라
숫자가 점점 많아지더니,
뜨거운 벽을 등지고
밥 덩어리 쪽으로 몰려 들었다
밥 덩어리를 통과하여
다시 떠오른 거품들은
눈알이 뿌옇게 흐려 있었다
참기름은
끓는 물의 표면에 떠서
호박빛 눈알을 굴리고
물먹은 밥알들은
바닥을 덮으며 불어 올랐다
나는
드디어 숟가락을 들었다
중심에 모여 풀리지 않는
참기름을 떠내고,
바닥을 부드럽게 저어
주어야 했다
있는 밥으로 죽 끓이는 일
무척 쉽지만
끝끝내 풀리지 않아
떠내야하는 부분이 있다




죽을 다 먹은 뒤,
복작대던 냄비 안과
빈 숟가락을 들여다본다
텅 빈 뱃전에 비스듬히
기대있는 노 하나

주변도 중심도
물도 기름도
밥도 죽도
사라진
둥근 배 안

나는
다시 노를 든다,
앉았던 항구를
두 삿대를 일어켜 밀어낸다

식탁,
이 불멸의 항구를 찾아
어깨가 처져서 돌아올
저녁 뱃사람들을 위해

ㅡ이향지,
밥으로 죽 끓이기ㅡ



이향지 시인은 1942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했으며, 1967년 부산대를 졸업했다. 198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으며, 2003년 제4회 《현대시 작품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괄호 속의 귀뚜라미》(1992년 현대세계刊), 《구절리 바람소리》(1995년 세계사刊), 《내 눈앞의 전선》(2003년 천년의시작刊), 山詩集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2001년 나남출판刊)이 있고, 편저《윤극영전집 1,2권》 (2004년 현대문학刊), 산악관련 저서로 《금강산은 부른다》(1998년 조선일보사刊·공저), 《북한 쪽 백두대간, 지도 위에서 걷는다》(2001년 창해刊), 산행 에세이《산아, 산아》(2001년 창해刊)가 있다.             





대표작인 ‘반달’과 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엄마야 누나야’, 저절로 장단을 맞추게 되는 ‘고기잡이’와 ‘우산’, 아련한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따오기’에 ‘설날’과 ‘어린이날 노래’까지.
윤극영(1903~88)이 작곡한 동요들은 세대를 넘어 동심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의 동요와의 만남은 이땅의 유년들이 성인이 되기 전 당연히 거치는 통과의례였다.
윤극영의 동요는 물론 그가 발표하지 않고 갖고 있던 중편소설과 미완성 시나리오, 이런 저런 지면에 실렸던 회고록 등 '윤극영 문학'의 모든 것을 담은 '윤극영 전집'(현대문학)이 출간됐다. 각각 800쪽에 육박하는 두 권의 전집에는 미발표 유고 시 264편도 실렸다.
전집의 출간은 윤극영의 둘째 며느리이자 시인인 이향지(62)씨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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