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우리가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 신경림 본문
질척이는 골목의
비린내만이 아니다
너절한 욕지거리와
싸움만이 아니다
우리가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이 깊은 가난만이
아니다
좀체 걷히지 않는
어둠만이 아니다
팔월이 오면
우리는 들떠오지만
삐걱이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
아니면 소줏집 통걸상에서
우리와는 상관도 없는
외국의 어느 김빠진 야구 경기에 주먹을 부르짖고
미치광이 선교사를 따라
핏대를 올리고
후진국 경제학자의 허풍에
덩달아 흥분하지만
이것들만이 아니다
우리가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이 쓸개 빠진
헛웃음만이 아니다
겁에 질려 야윈
두 주먹만이 아니다
우리가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서로 속이고 속는
난장만이 아니다
하늘까지 덮은
저 어둠만이 아니다
ㅡ신경림, 우리가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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