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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오랜만에 서울올라와 만난 친구가 이거 한번 읽어보라며 옆구리에 푹 찔러준 책 헤어져 내려가는 고속버스 밤차 안에서 앞뒤로 뒤적뒤적 넘겨보다 발견한, 책갈피에 끼워져 있는 구깃한 편지봉투 하나. 그 속에 빳빳한 만 원짜리 신권 다섯 장 문디 자슥, 지도 어렵다 안 했나! 차창 밖 어..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 속에 하늘이 있고 흰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地球)의 섬 우에 앉았다 ㅡ김달진, 샘물ㅡ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
그 산에 동백사라는 절이 있더란다. 그 절에서 수행을 하던 주지스님이 득도 직전 아름다운 여인에 홀려 벼락을 맞아 바다에 떨어졌는데, 가사옷이 날아가 가사도가, 장삼이 날아가 장산도가, 날아간 상의가 상태도, 하의가 하의도가 되었더란다 손가락은 주지도, 발가락은 양덕도, 목탁..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
칼을 버리러 강가에 간다 어제는 칼을 갈기 위해 강가로 갔으나 오늘은 칼을 버리기 위해 강가로 간다 강물은 아직 깊고 푸르다 여기저기 상처 난 알몸을 드러낸 채 홍수에 떠내려 온 나뭇가지들 옆에 앉아 평생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낸다 햇살에 칼이 웃는다 눈부신 햇살에 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