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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세월 뜸들여 깊은 맛 우려내려면 우선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자는 거야 햇장이니 갑갑증이 일겠지 펄펄 끓는 성질에 독이라도 깨고 싶겠지 그럴수록 된장으로 들어앉아서 진득하니 기다리자는 거야 원치 않는 불순물도 뛰어들겠지 고것까지 내 살(肉)로 풀어보자는 거야 썩고 썩다가 ..
쓰레기통 열자 음식 찌꺼기 엇섞여 뻘뻘 땀 흘리며 썩고 있는 중이다 아, 그런데 놀라워라 좌불한 스님처럼 그 속에 천연덕스레 앉아 싹 틔우고 있는 감자알 통 속이 일순 광배 두른 듯 환해지네 저 푸른 꽃 캄캄한 악취에도 육탈하는 것 따뜻하게 천도하는 저것이 바로 생불 ㅡ김화순,푸..
나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에게 남겨진 모든 시간을 내 심장이 멎은 뒤에도 두근대며 흘러갈 시간을 친구가 눈을 감던 그날 나 문득 두려움 느꼈네 이 사랑 영원할 수 있을까 나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 죽은 뒤에도 영원할 시간을 그 끝모를 사랑의 맹서를 ㅡ정희성, 선물ㅡ [미자..
이 세상에 살구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복숭아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꽃이 만들던 그 섭섭한 그늘자리엔 야윈 햇살이 들다가 만다고 쓰고 꽃 진 자리마다엔 또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살구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복숭아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그러니까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희..
내가 사는 산에 기댄 집, 눈 내린 아침 뒷마당에 주먹만한 발자국들 여기저기 어지럽게 찍혀 있다 발자국은 산에서 내려왔다, 간혹 한밤중 산을 찢는 노루의 비명을 삼킨 짐승일까 내가 잠든 방 봉창 아래에서 오래 서성이었다 밤새 내 숨소리 듣고 있었는가 내 꿈을 다 읽고 있었는가 어..
홀로 되어 자식 같은 천둥지기 논 몇 다랑이 붙여먹고 사는 홍천댁 저녁 이슥토록 비바람에 날린 못자리의 비닐 씌워주고 돌아와 식은 밥 한 덩이 산나물 무침 한 접시 쥐코밥상에 올려놓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흙물 든 두 손 비비며 ㅡ고진하, 쥐코밥상 ㅡ
누군가 새벽부터 길을 만들고 있다 안개를 걷던 가을이 고개를 낮춘다 검게 탄 울음소리가 길 위를 나딩군다 몸속의 슬픔 터진 어미는 눈이 멀었다 아들인, 아들이었던 한 사내가 입 잠긴 채 수척한 추억을 안고 길 밖으로 떠나고 있다 ㅡ황인원, 풍경ㅡ 십일월 끝자락 길! 훤하다 굳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