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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이 지배하는 어느 한 순간, 삘 받은 수작이가 쓴 시 본문

영감이 지배하는 어느 한 순간, 삘 받은 수작이가 쓴 시

난자기 2015. 12. 16. 15:46

 

 

 

 

 

 

 

 

 

 

 

 

나는 걷고 있다. 나는 합정에서 망원 쪽으로 걷고 있다. 나는 걸으면서 본다. 나는 걸으며 사람들과 자동차들과 건물들과 불빛을 본다. 나는 바람을 본다. 나는 기억을 본다. 나는 나를 보고 너를 본다. 너는 멀리 있다. 너는 언제나 떨어져 있다. 나는 걷고 있었다. 나는 앉아 있다. 나는 앉아서 바람 소리를 듣는다. 멀리서 개가 짖는다. 나는 멀리서 개가 짖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다. 밤이다. 여름밤이다. 나는 앉아서 이것을 쓰고 있다. 바람이 분다. 책들은 자신의 몸을 열지 않는다. 오늘은 좀처럼 말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감나무의 잎은 흔들리고 어떤 비유는 망설이고 있다. 나는 그 어떤 비유도 불러내지 않는다. 다시 개가 짖는다. 골목의 그림자는 크다. 멀리서 바람은 불어온다. 나는 걷고 있었다. 나는 걸으며 당신을 생각한다. 나는 걸으며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자카야 노을의 한자리에 앉아 너를 기다린다. 나는 맥주를 마시고 있다. 너는 온다. 나와 너는 잔을 맞댄다. 소리가 난다. 너는 웃는다. 너는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너는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너는 환하게 웃는다. 너는 빠르게 말한다. 너는 느리게 말한다. 너는 힘없이 말한다. 너는 농담한다. 나는 담배를 피운다. 나는 이자카야 노을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 나는 하늘을 본다. 나는 쓰레기더미를 본다. 나는 개들이 짖는 소리를 들으며 의자에 앉아 있다. 바람이 분다. 나는 앉아서 이것을 쓴다. 나는 걷고 있었다. 나는 누워서도 걷고 있었다. 나는 바람과 함께 걷고 있었다. 나는 걸으면서 바람을 보았다. 나는 걷고 있었다. 여름이었고 밤이었다. 나는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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