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삼포 가는 길/황석영 본문
「삼포 가는 길」과 민중의 시대
때로는 짤막한 소설 한 편이 역사의 실질적인 단절을 만들어 내는 기폭제 노릇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소설이란 전에 없던 이야기의 창안을 통해 이 세상의 주변부적인 현상을 불러들이고 그를 통해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상을 발명하고자 하는 특성을 지닌다. 물론 모든 소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이라는 제도는 끊임없이 새롭게 창안된 이야기를 통해 전혀 이질적인 세계상을 구성해 낼 것을 권장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강요한다. 소설이라는 제도는 하나의 창안된 이야기를 통해 그 시대를 떠도는 현상들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횡단하고 게다가 기존의 것과는 다른 인과성을 부여하여 전혀 새로운 시대상을 발명할 때만 그 가치를 인정해 주는 특이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하여, 소설은 인간의 어느 실천 영역보다도 먼저 현실의 새로운 징후에 날카로운 촉수를 들이대고 급기야는 시대 전반이 예측조차 하지 못한 시대상을 발명해 내곤 한다. 그러므로 종종 짤막한 소설 한 편에 의해서 발명된 세계상이 그 시대의 역사적 패러다임 혹은 시대정신을 균열시키고 내파시키는 작지만 근본적인 진원지가 되곤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당연하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은 역사적 전환의 기폭제가 된 유일한 소설은 아니지만 한국 소설 혹은 한국 역사에 획시기적(劃時期的) 전환을 이끈 몇 안 되는 소설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삼포 가는 길」은 한 곳에 머물 수 없는, 그러니까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세 인물의 짧은 순간의 동행기다. 외관상으로 보자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만, 이 우연스럽고도 짧은 동행기가 한국의 역사에 거대한 전환을 가져오는 기폭제 역할을 담당한다. 이 짧은 동행기가 당대의 시대적 규범이 얼마나 무수한 비정상적인 것, 우연적인 것, 차이, 고유성, 계산되지 않는 가치, 말하지 못하는 주체들의 고통과 희망을 배제한 자리에서 유지되고 있는가를 선명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하여, 「삼포가는 길」 이래로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적 계산성의 원리에 의해 쓸모없는 실존으로 격하된 민중들을, 자연을, 고향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외면하고 진행된 근대화나 문명화를 더 이상 역사의 발전으로 규정할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 한국 사회 전반은 1970년대 초, 중반부터 본격화된 물질적인 풍요만을 목적하는 산업화에 대해 비로소 비판적 인식을 보일 뿐만 아니라, 소외된 민중의 우울과 그곳에 깃든 구원의 힘에 드디어 가파른 관심을 갖게 되니, 이러한 시대적 전환은 「삼포 가는 길」의 성찰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물론 「삼포 가는 길」 이후 한국 역사가 한 순간에 거대한 전회(前悔)를 행한 것도 아니고, 또 한국 역사 전반의 이러한 획시적 전환이 「삼포 가는 길」 한 편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삼포 가는 길」은 그러한 전환의 단 하나의 요인은 아니지만 가장 강력한 기폭제에 해당하며, 때문에 「삼포 가는 길」 이후 한국 소설, 더 나아가 한국 역사는 분명코 「삼포 가는 길」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이제 「삼포 가는 길」의 어떤 것이 그토록 오랫동안 당연시되었던 담론 체계 전반을 균열시키고 기존과는 전혀 다른 역사 지리지를 구축할 가능성을 열어젖혔는지를 살펴보자.
뜨내기들에 대한 관심과 호명
황석영의 소설에는 유독 뜨내기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임과 집과 길을 잃은 인간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황석영 소설의 주인공들은 임과 집에서 유리된 자들이면서 또한 새로운 임과 집을 찾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니 황석영의 인물 대부분은 최소한의 정주지나 최후의 길마저 박탈당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임과 원치 않는 이별을 하고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집에서 쫓겨난다. 그것은 산업화 때문이기도 하고, 남북 분단의 대립적 상황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이윤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만을 인정할 뿐 어떠한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전(全)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간 이들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갑작스럽게 임과 집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며, 그렇기에 당연히 새롭게 안주할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다. 이것만도 힘겨운데 그들은 새로운 거처로 나아갈 길마저 마땅히 찾지도 못한다. 몸과 마음을 잠시 누일 최소한의 안식처마저도 잃어버린 존재들, 황석영 소설의 주요 관심사는 바로 이들이다.
「삼포 가는 길」은 이러한 황석영의 주요 경향과 전혀 다르지 않은 소설이다. 「삼포 가는 길」의 인물들 역시 황석영의 대부분의 소설이 그러하듯 몸과 마음을 잠시 누일 최소한의 안식처마저 잃은 존재들이다. 이렇게 한 곳에 머물 수 없는 세 인물들이 우연히 만나 그날 하루를 동행하게 되는데, 「삼포 가는 길」은 바로 이들의 하루 동안의 동행기이다.
여기 세 명의 인물이 있다.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우연히 만나 먼저 동행을 시작하는 두 명의 남자는 한 곳의 공사가 끝나면 곧 또 다른 공사판을 찾아 나서야 하는 '뜨내기'들인 영달과 정씨이다. 그들은 같은 공사판에서 일을 하다가 그 공사판이 막을 내리자 우연히 같이 길을 떠나게 된다. 이들의 동행에 우연히 한 여성이 같이 끼어든다. 술집을 도망쳐 나온 작부 백화인데, 백화가 합류하면서 이들의 우연한 삼인행(三人行)은 시작된다.
그들은 물론 각기 다른 자신들만의 역사를 밟아 왔으며 그런 만큼 각기 고유한 역사 지리지와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중 「삼포 가는 길」의 서사를 추동하는 초점 인물인 영달은 처음에는 "아주 치사한 건달"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괜찮은 사내"이다. 정신분석학적 용어를 빌자면 그는 '분리 불안 장애'를 앓고 있는 인물이다. 언제부턴가 집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을 사는 그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나 누군가를 만나면 나중의 이별이 두려워 선뜻 정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면 "아주 치사한 건달"처럼 행세한다. 물론 영달의 상대방에 대한 경원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는 곧 상대방에게 넘치는 친밀성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통해 안정감을 획득한다. 그는 이렇게 혼자라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누군가를 갈구하며 이 넘치는 욕망 때문에 아무하고나 관계를 맺고 또 쉽게 헤어진다. 이렇게 그는 거듭거듭 아픈 이별에 고통받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사회적 관습을 위반하여 곤경을 치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이별을 아파하고 또 때로는 치도곤을 치르면서도 누군가와의 친밀성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한다. 결국 영달은 자신이 머물던 공사판에서 하숙을 치는 천가의 부인 청주댁과 정을 통하다 발각되며 그 사건으로 예정보다 빠르게 정처 없는 길을 나서기에 이른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인물인 정씨 역시 공사판을 전전하는 뜨내기이다. 그는 무슨 일인가로 '큰집'을 다녀왔고 그곳에서 배운 기술로 공사판을 전전하며 살아간다. 같은 뜨내기이면서도 그에게는 안정감이 있는데, 그렇다고 그에게 집이 있거나 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영달에게는 없는 것이 단 하나가 있는 바, 바로 갈 곳이다. 즉 그에게는 어떤 목적지가 있고 그것이 그를 안정적이게 만든다는 것인데, 그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고향이다. 그는 10여 년 동안이나 가지 않았던 고향인 삼포에 가고자 한다. 삼포 그곳은 "비옥한 땅은 남아돌아 가구, 고기두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정말 아름다운 섬"이다. 말하자면 삼포 그곳은 정씨에게는 생의 최고의 풍경이 담긴 곳이자 세상의 모진 세파를 전부 비본래적인 것으로 전도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영토(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탈영토화의 영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정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향을 향해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다. 삼포가 이미 그 목가적인 풍경을 잃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그래서 결국은 자신도 영달과 같이 갈 곳이 없어졌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삼포 가는 길」에는 이 두 명의 남성 외에 또 한 명의 동행이 있는데 술집 작부 백화이다. 백화는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었지만 열여덟에 가출해서, 쓰리게 당한 일이 많기 때문에 삼십이 훨씬 넘은 여자처럼 조로해 있는" "관록이 붙은" 술집 작부이다. 술집 작부와 짝이 맞는 '백화'라는 이름 아래 '점례'라는 본래의 이름을 묻어 두고 살아가는 그녀는 그녀의 과장되고 자학적인 표현에 따르자면 "나 백화는 이래 봬두 인천 노랑집에다, 대구 자갈마당, 포항 중앙대학, 진해 칠구, 모두 겪은 년"이다. 이런 굴곡진 삶은 그녀에게 누구 못지않은 악다구니를 갖게 해 그녀는 "국으루 가만 있다가 조용한 데 가서 한 코 달라면 몰라두 치사하게 뚱보 돈 먹자고 나한테 공갈 때리면 너 죽구 나 죽는 거야"라는 식의 거친 표현에 어떤 망설임도 없는 인물이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악다구니는 그녀의 고달픔, 두려움, 공포를 이기기 위한 방어기제일 뿐이다. 그녀는 정작 누구보다도 힘겹다. "어디 가서 여승이나 됐으면······. 냉수에 목욕재계 백일이면 나두 백화가 아니라구요, 씨팔." 그녀는 결국 극도의 우울과 고통에 붙들려 있다가 결국 고향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탈출을 감행, 영달 등과의 짧은 여행에 합류한다. 그리고 그 짧은 동행 과정에서 영달에게 애정을 느끼지만 차마 표현하지 못하고, 영달의 배려로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른다.
「삼포 가는 길」은 이렇게 우연히 만난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그리 길지 않은 동행기이다. 이 각기 다른 세 사람이 벌이는 갈등과 화해, 만남과 헤어짐의 기록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이라 할 만하다. 당시의 근대화, 문명화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행복과 풍요를 위한 유토피아 프로젝트로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회 구성원 모두의 삶의 질이 개선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었는 바, 이 막노동판의 노동자, 술집 작부의 우울하고도 절망적인 동행기는 그 근대화 프로젝트가 사실은 수많은 하위 주체들의 생존과 자존을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삼포 가는 길」은 60년대 이후 산업화 논리에 의해 사회 구성원들의 관심 밖에 밀려나 있던 그 수많은 하위 주체들을 불러내고 그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한국 사회 발전의 유일한 방법으로 의심조차 받지 않았던 산업화, 근대화가 선한 기능뿐만 아니라 악마적 역능까지도 수행한다는 점을 예리하게 묘파한 소설이라 할 수 있거니와, 이것이야말로 「삼포 가는 길」의 중요한 성과라 할 만하다.
그리운 고향, 사라진 고향
그렇다고 근대화에 깃든 악마성의 발견이 「삼포 가는 길」의 성과의 전부는 아니다. 이러한 성찰이 전부라면 「삼포 가는 길」의 성과는 그리 대단하다고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비록 당시로서는 드문 것이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불균등한 배분과 그에 따른 사회적 모순의 비판에 관한 소설이라면 「삼포 가는 길」 이전에도, 또 그 이후에도 수없이 씌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포 가는 길」은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반영에만 그치지 않는다. 「삼포 가는 길」은 이윤 외에는 어떠한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자본주의적 모순이 사회경제적 황폐함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마저도 불구적인 것으로 전락시킨다는 사실을 치밀하게 그려 내는 바, 이것이야말로 「삼포 가는 길」이 문제적인 또 하나의 요인이다.
「삼포 가는 길」은 외관상으로 보자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세 명의 우연한 동행기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세 명 모두가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정씨와 백화는 같은 뜨내기이지만 영달에게는 없는 무엇이 있다. 바로 갈 곳이다. 게다가 그들이 갈 곳이란 그냥 어떤 곳이 아니라 고향이다.
"그래요. 밤마다 내일 아침엔 고향으로 출발하리라 작정하죠. 그런데 마음뿐이지, 몇 년이 흘러요. 막상 작정하고 나서 집을 향해 가 보는 적도 있어요. 나두 꼭 두 번 고향 근처까지 가 봤던 적이 있어요. 한번은 동네 어른을 먼발치서 봤어요. 이름이 백화지만, 가명이에요. 본명은······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아."
"사람이 많이 사나요, 삼포라는 데는?"
"한 열 집 살까? 정말 아름다운 섬이오. 비옥한 땅은 남아돌아 가구, 고기두 얼마든지 잡을 수 있구 말이지."
영달이가 얼음 위로 미끄럼을 지치면서 말했다.
"야아, 그럼, 거기 가서 아주 말뚝을 박구 살아 버렸으면 좋겠네."
"조오치. 하지만 댁은 안 될걸."
"어째서요."
"타관 사람이니까."
정씨와 백화는 이처럼 삶이 힘겨울 때면 고향을 떠올린다. 이 고향에 대한 기억은 정씨와 백화가 극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의 고유한 리듬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하는 원천이 된다. 그들은 지금, 이곳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라도 그 극한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고 학대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영달 같은 존재가 이곳에 있어도 힘겹고 또한 이곳을 떠나면 더욱 힘겹기 때문에 이곳에 머물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최악의 상황을 반복하고 있다면, 정씨와 백화가 놓여 있는 자리는 그런 최악의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정씨와 백화에게는 언제 어느 때든지 가고 싶으면 갈 곳이 있고, 또 그곳에 가면 바로 그 순간 자신들의 지친 몸과 영혼을 깨끗이 정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정씨와 백화는 영달과는 달리 분리 불안에 시달리며 아무런 애정도 없이 아무나와 관계를 맺는 조급함 따위를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결국은 혼자 남을까 두려워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곁에 두지 못하고 떠나보내거나 하지 않는다. 고향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그들을 받쳐 주고 있으므로.
「삼포 가는 길」에서 이들 셋은 내내 같은 길을 걷지만 당연히 그 걸음걸음의 활력이나 의미는 크게 다르다. 영달은 다만 또 다른 일터를 찾아 나설 뿐이지만, 정씨와 백화는 자신들의 피곤한 몸과 마음을 누일 터전으로 귀환하는 길인 것이다. 그렇게 영달과 정씨 등은 "전혀 사정이" 다르다. 정씨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영달이는 또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길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우연한 동행이 끝날 즈음에 이들 사이의 차이는 사라진다. 이 우연한 동행의 마지막에 이르러 정씨나 백화는 어느새 자신들이 돌아갈 고향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고향행 기차를 타기 위해 감천역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어디 일들 가슈?"
"아뇨, 고향에 갑니다."
"고향이 어딘데······."
"삼포라구 아십니까?"
"어 알지, 우리 아들놈이 거기서 도자를 끄는데······."
(중략)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 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작정하고 벼르다가 찾아가는 고향이었으나, 정씨에게는 풍문마저 낯설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영달이가 말했다.
"잘됐군. 우리 거기서 공사판 일이나 잡읍시다."
그때에 기차가 도착했다.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방금 잃어버렸던 때문이었다. 어느 결에 정씨는 영달이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
기차가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갔다.
정씨는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기 직전 고향이 크게 변했다는 소식을, 아니, 사라져 버렸다는 소식을 접한다. 삼포라는 지명은 남았지만 그곳은 더 이상 고향은 아닌 것이다. 그토록 가고자 했던 고향, 자신의 모든 고난을 위로해 주고 그들의 삶을 다시 의미로 충만하게 해 줄 것이라 믿었던 고향이 이미 사라져 버렸으니, 정씨는 이제 "영달이와 똑같은 입장"이 된다. "마음의 정처를 잃"기는 백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 소설 어디에도 백화의 고향이 정씨의 고향처럼 그 목가적인 풍경과 본래적인 의미를 잃었다는 구절은 없다. 하지만 백화의 고향 역시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아들/딸들을 아무 말 없이 다독여 줄 공동체적 질서는 잃었을 것이라고 암시되어 있으니, 백화의 고향도 이미 사라졌기는 마찬가지이다. 비록 백화의 고향이 목가적인 풍경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곳을 지배하는 원리는 모든 존재들을, 특히 상처받은 존재들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대지적 모성이 아닌 만큼 백화의 고향은 상처를 입고 돌아온 아들/딸들에게 위안은커녕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백화 역시 "마음의 정처"를 잃었기는 마찬가지이며, 그녀 역시 "영달이와 똑같은 입장"이 되고 만 셈이다.
이처럼 「삼포 가는 길」은 사회의 막장으로 떠밀린 존재들의 우연한 동행기이면서 동시에 고향이라는 마음의 정처 탓에 그나마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존재들의 또 한 차례의 전락담(轉落談)이기도 하다. 여기서 「삼포 가는 길」이 영달의 처지와 정씨와 백화의 처지를 서로 '마음의 정처'의 있고 없음을 기준으로 구분했다는 사실, 그리고 결국은 정씨와 백화가 영달의 자리로 내려앉는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세계상이야말로 「삼포 가는 길」의 고유하면서도 특기할 만한 발명품이라 일컬음직하다. 「삼포 가는 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뜨내기 인생에 대한 소설은 많았지만, 「삼포 가는 길」처럼 뜨내기들을 분류하고 그들 사이의 또 한 번의 전락을 그려 낸 소설은 없었던 것이다. 「삼포 가는 길」은 하위 주체들의 또 한 차례의 전락담을 통해서 산업화로 표상되는 근대의 유토피아 프로젝트가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존재들을 또 한번 전락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나 그들의 '마음의 정처' 혹은 '영혼의 안식처'를 빼앗아 버림으로써 그들을 다시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대단히 서정적인 문체로 담담하게 그려 낸다. 하지만 이 담담한 서경화(敍景畵)가 주는 충격은 무시무시할 정도이다. 아니, 「삼포 가는 길」이 발명해 낸 세계상에는 당시의 시대적 규범, 더 나아가 오늘날의 시대적 규범을 전복시킬 정도의 폭발력이 내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사회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산업화, 문명화라는 유토피아 프로젝트가 사실은 임과 집과 길이 없이 계속 떠돌아다녀야 하는, 이것만으로 충분히 불우(不遇)한 존재들을 한번 더 낮은 단계로 전락시키는 야만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 「삼포 가는 길」로 인해 너무도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뜨내기들의 사랑 혹은 구원의 힘
그런가 하면 「삼포 가는 길」은 영달과 백화 사이에 펼쳐지는 숨막히는 사랑과 이별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아니 진정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삼포 가는 길」의 삼인행은 먼저 동행하던 영달과 정씨에 백화가 합류하면서 이루어진다. 새벽에 길을 나선 영달과 정씨는 아침 요기를 위해 작은 읍내의 주점에 들러 그곳에서 백화라는 작부가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혹여 길을 가다 만나 잡아다 주면 적지 않은 사례비를 준다는 유혹과 함께.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인데 감천역으로 가는 길목에서 영달과 정씨는 백화를 만난다. 몇 푼의 노자밖에 없는 처지인지라 영달은 당연히 사례비 생각이 나나, "나 그 사람들께 손해 끼친 거 하나두 없어요. 빚이래야 그치들이 빨아먹구 나머지구요. 아유, 인젠 술하구 밤이라면 지긋지긋해요. 밑이 쭉 빠져 버렸어. 어디 가서 여승이나 됐으면······" 하는 그녀의 말에 동정심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백화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는 백화에 대한 연민의 정을 품기에 이른다.
작업하는 열흘간 백화는 그들의 담배를 댔다. 날마다 그 어려 뵈는 죄수의 손에 몰래 쥐여 주곤 했다. 다음부터 백화는 음식을 장만해서 감옥 면회실로 그를 만나러 갔다. 옥바라지 두 달 만에 그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백화를 만나러 왔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병사는 전속지로 떠나갔다.
"그런 식으로 여덟 사람을 옥바라지했어요. 한 달, 두 달, 하다 보면 그이는 앞사람들처럼 하룻밤을 지내구 떠나가군 했어요."
백화는 그런 일 때문에 갈매집에 있던 시절, 옷 한 가지도 못 해 입었다. 백화는 지나간 삭막한 삼 년 중에서 그때만큼 즐겁고 마음이 평화로웠던 시절은 없었다. 그 여자는 새로운 병사를 먼 전속지로 떠나 보내는 아침마다 차부로 나가서 먼지 속에 버스가 가리울 때까지 서 있곤 했었다.
이 백화의 과거 이야기는 두 사내, 그중에서 특히 영달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다. 영달은 '백화'에게서 작부가 아니라 이름 그대로 세상의 어둠 속에서 "더욱 새하얗게 돋보"이는 순결한 꽃의 이미지를 발견하고, 나중에는 발이 삐어 꼼짝 못하는 백화를 업어 주며 지난날의 연인까지를 떠올린다. "백화가 어린애처럼 가벼웠다. 아마 쇠약해진 탓이리라 생각하니 어쩐지 대전에서의 옥자가 생각나서 눈시울이 화끈했다." 영달은 잠시 동안의 만남이지만 사랑에 빠져 버린다. 그러니까 결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그녀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그녀의 악다구니와 그 안에 오롯이 숨쉬고 있는 '백화' 같은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녀의 도움을 받아, 아무와 관계하되 진정으로 관계하지 않는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영달에게서 사랑을 느끼기는 백화도 마찬가지이다. 백화는 처음 영달이 식당집 사례비 운운할 때는 "치사한 건달"을 발견하나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타자에 대한 배려가 넘치는 사내임을 알게 된다. 오히려 영달의 건달기가 타자에 대한 배려나 사랑으로 인해 줄곧 상처를 받곤 했던 그의 불행한 과거가 만들어 낸 방어기제임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발이 삔 자기를 서둘러 업는 영달에게서 결정적으로 호감을 갖게 된다. 영달 같은 인물이라면 세상 사람이 작부에게서 갖는 오만과 편견이 없을 것이며 더 나아가 작부 생활을 하며 겪었을 상처마저도 하나하나 보듬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 것이다.
백화와 영달은 그렇게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서로에 대해 지니는 애정의 열도와 밀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헤어진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기에 도대체가 서로를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영달은 정말로 백화를 좋아하지만 백화를 또 다시 전락시킬까봐 선뜻 나서질 못한다. 지난날의 사랑처럼 큰 상처를 줄까 두려운 것이다. 영달은 "어디 능력이 있어야죠"라며 백화를 떠나보내기로 결심하는데, 이 영달의 말 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하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자신에 대한 회오가 가득하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백화가 제발 고향으로 가기를 바라며 차표와 찐빵과 달걀을 사 주는 일뿐이다. 백화 역시 적극적이지 못하다. 영달이 붙잡아 주지 않는다면 먼저 나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차표를 건너는 영달에게 "정말, 잊어버리지······ 않을게요"라거나 "내 이름은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 이점례예요"라는 말로 답하는 것 이상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영달은 차표를 건네며 고향으로 돌아가 이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백화는 자신의 본명을 알려 주며 자신이 정말로 직업적으로가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영달을 사랑했음을 진정으로 고백한다. 그리고는 헤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 모두는 "마음의 정처"를 잃은 채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간다.
진실로 서로를 위하기에 서로를 붙잡지 못하는 이 한없이 이타적인 풍경이야말로 「삼포 가는 길」이 창조해 낸 또 하나의 위대한 세계상이라 할 만하며, 이는 「삼포 가는 길」을 풍요롭게 한 또 하나의 문제적인 장면임에 틀림없다. 일찍이 "위험이 있는 곳엔 구원의 힘도 함께 자란다"고 한 것은 휠더린이거니와, 「삼포 가는 길」 역시 산업화가 양산해 내고 있는 위험 요소인 뜨내기들에게서 오히려 산업화가 초래한 위험을 구원할 힘을 발견한다. 그들은 자기만을 배려하는 차갑고도 메마른 근대적 모럴 때문에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는 극한 상황에 내몰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또 다른 존재들을 극한에 몰아넣는 대신에 서로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거니와, 「삼포 가는 길」은 이것으로 근대성의 그 냉정한 모럴을 넘어서기를 꿈꾼다.
종합하자면 「삼포 가는 길」은 세 명의 뜨내기들의 우연한 동행기 속에 산업화, 문명화가 인간에게 가져온 재앙을 치밀하게 기록함과 동시에 그 재앙 속에서 움트는 구원의 힘도 같이 제시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삼포 가는 길」의 역사철학이 얼마나 혁신적이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는 「삼포 가는 길」 전후로 민중 담론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 의제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도 무조건적인 근대화나 산업화를 반성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포 가는 길」의 전복성과 문학성
「삼포 가는 길」의 이러한 전복성은 우선 작가의 치밀한 관찰력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역사철학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인간 존재에게 있어 고향의 목가적인 풍경이 차지하는 의미와 위상을 통찰해 낸 작가 황석영 특유의 역사철학이 그저 한 덩어리로 보이는 뜨내기들 사이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었고 결국 이렇게 발견된 전혀 새로운 실재가 급기야는 당대의 시대적 규범을 한순간에 무화시키는 결과를 낳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한 「삼포 가는 길」 특유의 전복성은 「삼포 가는 길」의 치밀한 구성에 힘입은 바 크다. 「삼포 가는 길」은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뜨내기들의 거친 말들을 통해서 산업화에 따른 그들의 고통과 원망을 드러내고, 또 불안정한 뜨내기와 보다 안정적인 뜨내기 사이에 나타나는 미세한 행동 방식의 차이를 통해서, 혹은 고향을 향할 때 그 인물들이 보이는 자신 있는 행동과 고향을 잃었을 때 한없이 머뭇거리는 행동 사이의 차이를 통해 고향의 정신적 의미를 완곡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의 거친 말들과 따뜻하고 아름다운 내면의 비교, 대조를 통해 그들에게 잠복되어 있는 구원의 힘을 그야말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제시한다.
「삼포 가는 길」의 이 자연스러움은 전적으로 부분과 전체, 인물과 인물, 사건과 사건 사이의 유기적인 통일성에 기인할 터인데, 「삼포 가는 길」의 이 유기적인 통일성은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소설적 상황 속에 흠뻑 빠져들어 영달에게 자신을 투사하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읽는 이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정씨가 되고 백화가 되어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에 던져진다.
그렇게 되면 이제 더 이상 산업화가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한 유토피아 프로젝트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물론, 우리가 "치사한 건달"이라고 밀쳐 두었던 그 뜨내기들에게서 우리에게는 이제 저 가슴 한켠에 간당간당 남아 있는 이타성이라는 구원의 힘을 읽어 내기에 이른다. 그저 단 한 편의 소설을 읽었을 뿐인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되는 셈인데,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소설, 그러니까 우리의 선입견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들을 발견하여 그것으로 전혀 새로운 세계상을 구축한 소설만이 행할 수 있는 혁신성이다.
우리는 고향의 향취를 애써 모른 체하고 산업사회의 한 일원으로 진입하려는 한 인물을 빼어나게 그려 낸 바 있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기억한다. 우리는 「무진기행」의 주인공이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결국 고향을, 고향에 깃든 자신의 무시무시하고도 매혹적인 역사와 기억 전체를 등지는 장면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바 있다. 아니, 오히려 한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위한 탈향인 만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조차가 쓸데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 바 있다. 그렇게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땅, 영혼의 안식처인 고향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이 물질적인 풍요만을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고 한국 사회 전반은 공동체 의식도 영혼의 안식처도 찾아볼 수 없는 불모의 사회로 변모한다.
「무진기행」 이후 1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 씌어진 소설이 「삼포 가는 길」이다. 그런데 그 「삼포 가는 길」에는 흥미롭게도 「무진기행」의 주인공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떠나온 그 고향이 어떻게 변했으며, 그렇게 목가적인 고향 풍경을 지워 낸 산업화가 어떤 비극들을 불러내었는지가 충격적으로 그려져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삼포 가는 길」을 통해 고향이란 단순히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니라 인간의 최대의 행복이 깃든 곳이어서 고향에게는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으며 어떠한 선택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뼈저리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한 평론가가 "「무진기행」에서 「삼포 가는 길」까지 10년 걸렸다"라는 표현을 쓴 바 있거니와, 오늘 나는 문득 이 표현을 이렇게 바꿔 보고 싶다. "「무진기행」에서 「삼포 가는 길」까지 10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최고의 축복이다"라고.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삼포 가는 길」은 무엇보다도 현대사회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나 의미 있는 존재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뜨내기'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삶을 역사적으로 맥락화함으로써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혹시 지금, 이 시대에 「삼포 가는 길」의 뜨내기들처럼 사람들 관심 밖에 있지만 우리의 세계 내적 위치를 알려 주는 데 적확한 존재들이 있다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시대건 그 시대는 시대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중심적인 것과 주변부적인 것을 나누고 그중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를 운영해 간다. 이러한 사회 운영 원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이어서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면밀하게 관찰해 보면 그 사회 운영 원리는 수없이 많은 하위 주체들(우리가 바로 여기에 속해 있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의 절실한 욕망과 원망들을 억압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시킴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시대가 권장하는 가치관 때문에 오히려 고통받는 존재들이 우리의 주변에는 적지 않은 바 그 존재들에 관심을 가져 보는 것은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데, 그리고 우리가 보다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삼포 가는 길」의 인물들은 고향이 있고 없음에 따라 마음가짐이나 행동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각자 자신의 고향은 어디인지, 또 그 고향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고향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하지만 고향은 그 이상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태어나서 자라는 그 시기에 생애 최대의 행복을 맛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주변의 존재들과 어울리며 하나가 되는 일체감 같은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지금 자신의 차갑고도 메마른 삶과 구분되는 어떤 순간을 갖고 싶어하며, 고향에서의 행복한 시간이 만들어 낸 판타지일 수도 있다. 그렇게 이상화된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가 고향을 떠올린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 생애 최고의 행복의 순간이 현재의 황폐한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3. 「삼포 가는 길」은 자본주의적 합리성과 그에 따른 사회 전반의 산업화, 도시화를 현존재들을 불행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고 뜨내기들의 짧고 강렬한 사랑과 친밀한 관계를 통해 우리의 불행을 넘어설 가능성을 발견한다. 만약 자신이 불행하다면 그 불행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또 그 힘겨운 상태를 넘어설 수 있는 계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살아온 역사와 살아가는 방식이 모두 다 다르므로 사람들마다 불행을 느끼는 원인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이 불행한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사회 전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관심은 곧 우리에게 사회에 대한 고유한 인식을 지니도록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의 힘을 찾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 중에 뭔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주목해 보는 것도 좋다. 시대에 순응하는 사람들이란 합리적인 존재처럼 보여도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 시대의 불행을 확대재생산하는 존재일 가능성이 높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우리 모두 주변의 시대착오자들에게 눈을 돌려 보자.
[네이버 지식백과] 삼포 가는 길 - 고향 잃은 자들의 우울과 희망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 9. 18.,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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