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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사람의 아들』을 읽고 나서 학업
2015.11.0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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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초기작, 사람의 아들(민음사, 개정 4판, 2010)을 봤다. 읽고 싶은 책으로 기입한 건 2013년 전역한 후 얼마 안 됐을 때다. 메모장 상위에 항상 있는 모습이 싫어서 몇 주 전에 봤다. 이건 리뷰의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책을 읽고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책의 기본적인 내용은 담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사람의 아들'은 아하스페르쯔를 말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조롱하고 비난한 것으로 성경에서 그려진 남자다. 처음에 난 사람의 아들로 아벨을 죽인 카인을 생각했다. 작 중에서도 그러한 내용이 나온다.
카인은 왜 아벨을 죽였는가? 카인을 죽일 수 있고, 타인에게 살의를 가질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카인을 그렇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창조설(인간을 신이 창조했다는 설)에 따르면 야훼다.
아하스페르쯔는 신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사람은 신을 섬기기 위해, 혹은 섬길만하게 창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는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만, 소설에서는 신을 부정하기보다는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판단에 관여하지 않는 신, 먼저 있는 존재를 뒤에 온 말씀으로 속박하지 않는 신,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시인하는 신, 천국이나 지옥으로 땅 위의 삶을 간섭하지 않는 신, 복종과 경배를 원하지 않고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지 않는 신, 우리의 지혜와 이성을 신뢰하며 우리를 온전히 자유케 하는 신"을 찾으려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다. 아하스페르쯔는 고대종교를 탐구하며 그러한 신이 있는지를 찾으려 노력했고, 민요섭은 또 다른 사람의 아들로 신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그러한 신을 만드려 노력했다.
1. 피조물은 창조주의 의지를 뛰어넘을 수 있는가?
아하스페르쯔는 피조물이 창조주의 의지를 뛰어넘을 수 있느냐고, 랍비인 아버지에게 질문한다. 아하스페르쯔의 아버지는 이렇게 답한다. "물론 아니다. 우리 몸의 터럭 하나 숨결 한 갈래도 그분께서 주시지 않은 게 없는 것처럼 우리의 정신도 야훼 하나님의 의지 안에 있다." 아하스페르쯔는 다시 질문한다. "그럼 카인의 살의는 누구에게서 왔습니까?" 아버지가 대답한다. "갑작스럽지만... 그분-모든 것의 출발이신 하나님께서 주셨겠지. 그러나 금지(금지규범)과 함께였다." 아하스페르쯔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그 금지를 어기고 감히 살인으로 나아간 그 의지는 어떻게 됩니까?"
아하스페르쯔는 의지, 즉 악의 가능성 자체를 부여한 신에게 의문을 품는다. 저 물음은 "신이 모든 것을 만들었고 인간을 사랑한다면, 악마는 왜 만들었는가?"라는 신의 존재에 대한 오래된 비판과 유사하다. 신앙인들, 특히 우리나라에 많은 개신교 사람들은 저 질문 자체를 불경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성찰 없이, 살인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한 신을 찬양할 뿐이다. 아하스페르쯔는 "신이 만약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그 자유의지는 자유가 아니라 방임이라"고 비판한다. SF소설의 대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피조물 로봇이 창조주 인간을 배반할 수 없도록 3원칙을 만든다. 만약 야훼가 인간을 창조했다면, 왜 악에 대한 가능성을 같이 창조했을까? 개신교에서는 '시련을 줘서 믿음을 공고히 하기 위해'라고 대답한다. 야훼가 자신만을 섬기기 바라는 피조물을 원했다면, 그렇게 만들었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2. 종교의 목적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제기했듯, 종교의 목적은 실용적인 것이다. 사람은 종교에 기댄다. 종교는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하겠다. 마음에 안식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가 거짓임을 알면서도 믿을 수 있다. 이는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작중에서 이집트 고대종교의 늙은 제관과 아하스페르쯔의 대화이다.
아하스페르쯔: "사람들은 지금 나일의 범람을 이시스의 눈물 때문이라 믿고, 그걸 축복으로 여겨 감사와 찬미의 제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류인 이곳에서는 볼 수 없지만 나일의 이같은 범람은 사실 아득한 상류지역에 우기가 와서 그 빗물로 불어난 물이 이곳에 이르러 범람을 가져온 것뿐입니다. 결코 이시스의 눈물 때문은 아니며, 더욱이 그 축복일 수는 없습니다."
제관: "우리도 그것을 알고 있다."
아하스페르쯔: "그렇다면 알면서도 민중들을 속였단 말씀입니까? 이 성스럽고 장엄한 축제가 사실은 커다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단 말씀이십니까?"
제관: "아니다. 저들도 알고 있다." ...중략... "그렇다. 오히려 우리에게 속여주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축복이면서도 재앙이기도 한 나일의 범람은 예로부터 여러가지로 설명되어 왔다. 아주 옛날에는 누우나 아피의 권능에 의해서였으며 한떄는 세라피스의 축복이었다. ...중략... 생각해보아라. 세상이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여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랠 수 있고 찬미와 기구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를(후략)."
제관의 말대로, 사람은 종교에 기댄다. 지금은 과학이 종교를 대신하고 있고, 자연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인간에게 이롭게 통제할 수 있게 됐다. '만들어진 신'의 테제가 작 중에서도 보인다. 그 일부이다.
"자유의지와 선택의 문제는 더욱 고약하다. 옛적 이곳으로 붙들려 온 우리 조상들에게는 아마도 감탄스럽기 그지없었고, 또 그래서 창세기의 첫머리에서부터 그 개념을 꾸어다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인간에게 억지로 덮어씌운 그 주관적 환상은 변덕스런 신이 우리 인간을 학대하는 데 좋은 구실이 되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그러다가 아하스페르쯔는 드디어 짐을 쌌다. 고향을 떠난 지 그럭저럭 칠 년이 다 차 가는 어느 봄날이었다. 그런데 악의에 찬 전설은 페르샤의 고도를 떠나면서 그가 한 중얼거림 가운데 하나로 이런 말을 전한다. "원래 야훼는 엘 사타이 산에 은거하던 목양자의 신에 불과했다. 거기에 모세의 공기가 접한 호렙 산의 영이 더해져 야훼는 곧 가나안 쟁취를 위한 무자비한 군신으로 변질되었다. 그 뒤 엘리야와 호세아는 그에게 농경신의 권능을 더하였고, 아모스와 이사야를 통해 민족의 신에서 우주의 절대유일자로 확대되었다...후략..."
3. 행복과 선악은 상대적인 것
아하스페르쯔는 예수와 만난 뒤, 예수에게 독선(獨善)의 길을 버리고 이 땅의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중들에게 실질적인 메시아가 되라고 권한다. 사람의 아들 아하스페르쯔는 땅 위의 영화와 쾌락을 겪어봤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예수에게 지상에서의 권세와 쾌락을 가져다주는 종교가 좋은 종교라는 논리를 편다. 예수는 "지상의 권세와 쾌락은 순간이지만 천상의 권능과 복락은 영원하다는 걸 기억한다면 당신도 이내 그 세계가 허망함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한다. 행복 역시 상대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남들보다 조금 더 가졌고, 조금 더 우월할 때'다. 천년 뒤의 영원한 행복(올지 안 올지 모르는)과 작지만 가능하고 확실한 땅 위의 행복 중, 사람의 아들은 후자를 택했다.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다. 꿈에 그리던 일상이 반복된다면, 인간은 금방 그에 대해 권태를 느낀다. 선악도 마찬가지다. 선이 없다면 악은 존재할 수 없고, 아름다움이 없다면 추함도 존재할 수 없다. 아하스페르쯔는 선악, 행복 등 상대적인 개념을 신의 권능으로 없애라고 예수에게 말한다. "저들에게 죄 지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오. 고통스러운 자유를 회수하는 것이오." 더 큰 행복을 위해 불행을 느끼도록 하는 게 아니라, 혹은 선을 위해 악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악과 불행을 없애기 위해 행복과 선악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없애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기준 자체를 없애버린다면 행복과 선악 등 상대적 개념도 사라질 것이다. 더 작은 행복에 만족하고, 일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덜 받겠다는 사토리 세대의 발상과 비슷하지 않은가? 두 명의 사람의 아들들은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판단에 관여하지 않는 신, 먼저 있는 존재를 뒤에 온 말씀으로 속박하지 않는 신,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시인하는 신, 천국이나 지옥으로 땅 위의 삶을 간섭하지 않는 신, 복종과 경배를 원하지 않고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지 않는 신, 우리의 지혜와 이성을 신뢰하며 우리를 온전히 자유케 하는 신을 바라고, 민요섭은 그러한 신을 만든다.
4. 절대자는 절대자이므로, 거기에 인간의 복종과 찬미를 더해도 무의미하다
제목의 내용이 말하려는 전부이다. 기독교에 따르면 절대자(야훼)는 절대자이며 단독자이다. 스스로 위대하고 스스로 영광스러우며, 스스로 귀하다. 절대자에 비하면 작은 인간들이, 절대자에게 복종하며 찬미해도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마지막으로 민요섭이 만든 쿠아란타리아 서(書)의 일부이다. 글에서 '우리'는 신을 의미하고, '너희'는 인간을 의미한다.
우리는 너희 믿음이나 섬김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위대하고 또 완전하므로. 번거로운 제례와 의식으로 시간과 재물을 낭비하는 너희를 우리는 오히려 민망히 여기리라. 율법이나 말씀이 우리의 이름으로 너희를 찾고 간섭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너희를 지어낼 때 이미 모든 것을 주어 보냈다. 우리의 뜻을 알려고 헛되이 애쓰지 마라. 너희 영혼에 모두 담겨있어 길어내지 않아도 절로 솟으리라. 우리는 너희 악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우리 창조의 일부이므로. 선을 높이고 상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 또한 우리에게서 간 것이므로. 우리가 준 게 무엇이든 너희는 겨자씨만 한 것도 더하거나 덜지 못한다. 너희 모든 행위는 하늘에서도 땅 위에서도 아무런 빛깔이 없다. 그러하되 우리의 분별과 간섭이 없어진 뒤에도 사랑과 자비는 장려받을 것이다. 우리가 기뻐해서가 아니라 그게 너희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악은 여전히 비난받고 미움과 다툼은 억제받아야 한다. 그 또한 우리가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게 너희에게 해롭기 때문이다. ...중략...다시말하거니와 너희는 지음 받는 그 순간에 이미 완성되었다. 우리는 몸소 분별해야 하는 번거로움 대신에 너희에게 선을 불어넣었고, 간섭하는 수고 대신에 지혜를 내렸다. 그 선과 지혜를 정의와 자유로 나란히 누리게 되는가 독선과 악으로 스스로의 멍에를 삼는가는 오직 너희 손에 달렸다. ...중략... 너희 고통 위에 우리 즐거움이 있을 리 없고, 너희 슬픔이 우리 기쁨이 될 리 없다. 너희를 가장 잘 섬긴 자가 곧 우리를 가장 잘 섬긴 자이며, 모든 것은 너희에게서 비롯되고 너희에게서 끝나리라.
종교라고 보기에는 어렵지 않은가? 사람의 아들이 만든, 사람을 위한 종교의 교리라 볼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무신론에 가깝다. 저러한 신은 사람의 기댐을 받을 수 없어서 종교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민요섭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다. '불합리하더라도'(사실 모든 종교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용서와 구원은 신에게 있어야 했다. 2번 단락에서 봤듯, 불합리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에 기댈 수 있다. 어쨌든 진화론을 옳다고 생각하며 무신론자인 나에게, 사람의 아들들과 인간 개인의 의지, 자유에 의한 행위의 결과를 인정하는 쿠아란타리아 서의 교리는 매력적이었다. 나는 김수영, 이상을 좋아한다. 자기비판적이기 때문이다. 이문열과 김훈은 산문을 쓰는 사람으로 울림이 있는 문장을 쓴다. 책의 한 문장 한 단어가 심상치가 않다. 글을 좋아하고 글을 소비하고 생산하는 나에게, 그들은 여러모로 부러운 점도 많고 배울 점도 많다. 어찌됐건 독서는 참 즐겁다.
[출처] 이문열, 『사람의 아들』을 읽고 나서|작성자 김종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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