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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 최승호

난자기 2018. 5. 21. 15:23





변기의 구조는
크게 나누어보자면
똥을 담는 그릇과
똥을 빼내는
구멍으로 되어 있다
요강은 그렇지 않다
요강의 똥은 빠져나갈 곳이 없으므로 쏟아버려야 한다
그런가 하면
똥통은
요강보다 훨씬 깊다
그걸 퍼내려면
긴 막대기 끝에
똥바가지를 매달아야 한다

제대로 된 똥은
천천히 꿈틀대면서
변기 물 속으로 떨어진다
똥!
이보다 더
우주적인 말이 있을까
항문 괄약근은 뱃속 찌꺼기들을 내보낸다
빅뱅!
오므렸다 펴고
오므렸다 펴는 空의 대설사
태초에 내보내야 할
엄청난 찌꺼기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한꺼번에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먼지들의 離合集散

똥, 離合 속의 삶
똥, 集散 속의 죽음

창자에서 똥을 빼내고
돼지 아닌 것들로
빈 창자를 가득 채워
삶은 것이 순대다
비 오는 날
순대광주리 옆에서
헤벌쭉 웃는 돼지머리,
그 돼지이빨 틈에
지폐를 끼워넣고
우리는
길바닥에 엎드려 넙죽
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ㅡ최승호, 똥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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