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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만화책이다 / 최금진 본문

나는 만화책이다 / 최금진

난자기 2018. 12. 18. 23:34







불공평한 세상을 너그럽게 사는 '유머' 의 교본이기도 하니까
듣거라, 불감증에 빠진
세상의 모든 연인들아,
잠들기 전에 벌써 내일을 걱정하는 우울한 가장들아
누구나 하나쯤 성경처럼
머리맡에 두고 암송할 유머를
기억해 두거라
평생 과부로 살다가
지금도 과부로 사는
우리 엄마 말씀이니라

요절한 우리 아버지는
가끔 거울을 보다가
미친 듯이 웃기도 했다는데
그것은 진실로 삶을 비웃는 자의 통쾌한 풍자는 아닐지라도
스스로 웃으면서
물로 걸어들어간 자의
힘센 표정이 아니겠는가
사랑스럽고 눈물나게 열등한
바로 그 얼굴이
인생의 전편과 후편에
매번 등장할 수밖에 없는
아비의 얼굴이고, 어미의 얼굴이고 또한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서른둘
뒤늦은 첫사랑처럼 뜬금없이 직장을 때려치우고야 깨달았다

혼자 돌아서는 어두운 골목 끝에서
세상의 가장 무서운 공허와 마주치는 사람아
서둘러 다음 페이지를 넘겨놓고
누런 입에서 웃음이 분수처럼 뿜어져나오도록 몸을 열어라
몸으로 받아먹고, 깡으로 받아먹은
코믹과 판타지와 순정만화의 대본들을 복권처럼 펼쳐보아라
야간 노동자인 달이 남루하게 웃는다
배고픈 유리창들이 꽉 다문 입을 덜컹거리며 웃는다

그러므로 듣거라
누구든 자신을 즐겨 읽지 않는 자는 벌이 천배!
웃지 않는 자는 벌이 만배로다!

ㅡ최금진, 나는 만화책이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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