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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검은 눈들이 보고 있었다 모두 21개의 눈들이었다 눈들은 대부분 빛이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눈들을 감시하였는데 시간이 지나자 눈들이 나의 감시자가 되었다 내가 움직이면 눈들도 움직였고 잠들면 그들도 잤으며 아무도 닿지 못하는 의식의 깊은 심연까지도 그림자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소름 돋는 공포였다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였다가 뼈아픈 굴절이었다가 애잔한 연민이기도 했다 어쩔 도리가 없어 눈들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눈들은 나의 운명이 되었다 검은 하늘에 장대같이 흰 비가 쏱아지던 날 한 눈이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다음날 두 눈이 손잡고 도로를 질주하였다 눈이 풀린채로 맨발로 도로를 질주하였다 바람개비가 쌩쌩 돌고 있었다 도로는 컴컴해서 앞이 잘보이지 않는데도 도로를 질주하였다 씨가 검은 ..
어느 게으른 봄날 햇볕 잘 드는 마당 한 켠에 치기어린 베롱나무 한 그루 심었는데 삼복이 다 되도록 싹눈 하나 틔우지 못하고 텅 빈 하늘만 우두커니 쳐다보는 네 당당한 모습에 지쳐 몇 번이고 뽑아 버릴까 하다가 이제까지 싹 한번 제대로 피워본 적 없는 너나 나나 피차 일반이다 싶어 거름을 부어주고 약해지지 말라고 포기하면 안된다고 우리 어머니처럼 말하게 되더라고 정말 견디기 힘든 건 한 줄기 바람과 한 줌 햇볕으로도 세상 꽃들은 잘도 피어나 자지러지는데 시샘도 없는지 배알도 없는지 여전히 얼음같은 너를 보는 것 아직도 잠속에서 나무가 되는 꿈을 꾸는 거니 삶과 죽음 그 흐릿한 경계를 헤메다 물 위로 떠 오른 오필리아의 주검을 위해 차가운 강가에 서서 그의 꽃이 되고 싶은 거니 속절없이 여름이 탄다 ㅡ 백..
"선생님 저 집에 언제가요?" "코로나 끝나야 가지" "코로나 언제 끝나요" "글쎄ᆢ" "코로나 5월달에 끝난다 ~" "그때 안 끝날걸" "그럼 6월에는요? " "글쎄 그때 돼봐야 알겠는데" "왜요?" "음 ᆢ 지금 코로나가 너무 많아서 6월에 코로나가 안 끝날 수도 있어 코로나 끝나면 집에 가자" "예! 코로나 끝나면 집에 간다" bj는 하루 종일 이런 질문만 하고, 나는 하루 종일 똑같이 저렇게 답변한다 미안하구나, 너에게 거짓말을 해서ᆢ bj는 20대후반의 잘생기고 건강한 청년이다 발달장애라는 멍에만 없었다면 누구나 봐도 늠름하고 전도 양양한 젊음이다 어릴 적부터 앓아온 선천성 자폐가 이 청춘에게 남들이 가는 평탄한 길로 가는 것을 막아 섰다 특이한 제스처와 가끔씩 신음에 가까운 톤으로 알 수 없는..
그 꽃은 말이 없었어 한동안 꼼작 않고 쳐다보다가 뿌리를 잘라 목 넓은 화분에 두었어 집이 비좁았던지 일그러져 가는 네 모습이 슬퍼 보여 나의 체온으로, 호흡으로 감싸 안고 밤마다 눈물로 화분을 적셨지 너는 꽃피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끝내 마지막 말까지 삼키고 떠나고 말았지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것은 곁에서만 피어나게 하는 것 흔들리게 하는 것 ㅡ 백난작, 반성 ㅡ
마당 한 가운데 하루 한 치씩 키를 늘려 하늘을 떠 받쳐온 반고(盤古) 닮은 소나무 비에 젖어 하늘을 생각하고, 비가 성가신 개는 제 집안에 넙죽 엎드려 어제 먹다 버린 빵에 대해 주인에 대해 생각하고, 봄비 내리고 언 땅밑에서 들려오는 벌때같은 아우성이 생각을 웅웅 지우고 필시 머지않아 산꽃들 내려와 내 작은 마당에 생각을 가득 부어놓을 것이라 생각하고 봄비 내리면 / 백난작
저기 소리가 있네 졸졸거리는 삐죽 고개 내미는 바람에 떠는 스르르 꽃물 드는 눈들이 화들짝 열리는 들린다 그 소리 - 백난작 / 得音(득음 ) -
-반고흐 -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 바람 한 줌 10 구름 한짝 20 시냇물 한 말 30 고등어 한 손 6,600 삽겹살 한 근 13,000 후라이드치킨 19,000 맹인 안마시술사 50,000 일용근로자 70,000 (주께서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쪽집게 강사 5,000,000 나 8,530 너 200,000 살찐 고양이 1,000,000 너와 나와 살찐고양이를 감시하는 눈꼬리 째진 늑대 100,000.000 우리는 모두 시간을 내다 파는 사람들 살같은 시간은 푸줏간 갈빗살이 비져 팔리듯 잘려나가고 뼈다구에 앙상하게 남은 피멍같은 시간을 파먹고사는 가련한 사람들 박제된 오소리 대가리처럼 검은 시멘트 벽에 메달려 지는 하루 해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가련한 사람들 거리를 걸어다니는 군상들 하나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