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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가을이 오면 창밖에 누군가 서성이는 것만 같다 문을 열고 나가 보면 아무도 없어 그만 방으로 돌아와 나 홀로 서성인다 가을이 오면 누군가 나를 따라 서성이는 것만 같다 책상에 앉아도 무언가 자꾸만 서성이는 것만 같아 슬며시 돌아보면 아무도 없어 그만 나도 너를 따라 서성인다 선듯한 가을바람이 서성이고 맑아진 가을볕이 서성이고 흔들리는 들국화가 서성이고 남몰래 부풀어 오른 씨앗들이 서성이고 가을편지와 떠나간 사랑과 상처 난 꿈들이 자꾸만 서성이는 것만 같다 가을이 오면 지나쳐온 이름들이 잊히지 않는 그리운 얼굴들이 자꾸만 내 안에서 서성이는 것만 같다 ㅡ박노해, 서성인다ㅡ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엔 없었던 난 그가 연필을 내려놓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한 두어 번 부러진 연필을 깎을 때였을까 그가 연필을 들고 있을 때만큼은 언제나 바나나 같은 향기가 손에 와 잡히곤 하였다 그는 마을 어귀 가장 낮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당엔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넣었다, 그러면 나비와 새 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읽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시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인기척이라곤 낙엽 같은 노트를 찢어대는 소리일 뿐 아니, 밤보다 깊은 울음소릴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을까 난 그의 글을 읽어..
더위는 참을만하다마는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저녁에는 부적절하게 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어 홍어 코빼기는 초장에 찍고 애는 참기름 장에 찍어먹고 내 애는 담근 술병에서 꺼내 반나절 말려 두었다가 그대의 속이 온전치 않은 날에 새끼배추와 몽근하게 끓여내야겠네 ㅡ김옥종, 홍어애탕ㅡ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 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ㅡ허수경, 不醉不歸ㅡ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하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시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ㅡ백무산, 정지의 힘
연보라빛 잔별처럼 핀 참꽃들을 에워싸고 꿈결인 듯 하늘거리는 헛꽃 잎들 영락없는 나비 날개다 나비는 피어오르는 는개 속을 날고 헛꽃과 참꽃의 윤곽이 흐려지고 발목 젖은 미끈한 적송들 사이로 희끗, 장주莊周의 옷자락을 본 듯하다 장마철 산사, 낮잠에서 깨어 ㅡ홍은택, 나비와 산수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