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시 (920)
오자기일기
눈먼 손으로 나의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 투성이었어 가시 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 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수 있을까 장미 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 투성이를 지나 장미 꽃 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송이의 장미 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 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 인가를 ㅡ김승희, 장미와 가시ㅡ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까지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 위에 서면 바람이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 나는 보았네 ㅡ류시화, 길 가는 자의 노래ㅡ
자벌레는 한 발자국이 몸의 길이다 한 발자국을 떼기 위해 온몸을 접었다 폈다 한다 자벌레라 불리지만 거리를 재지도 셈을 하지도 않는다 그런 그는 먹이를 지나칠 때도 사랑을 지나칠 때도 많다 그러나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한 발자국이 몸의 길이인 자벌레는 모자라는 것도 남는 것도 모두 다른 몸의 것이라 생각하며 몸이 삶의 잣대인 자벌레는 생각도 몸으로 하기 때문이다 ㅡ구광렬, 자벌레ㅡ
혼자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나는 믿었지만 행복 속에 안녕이 없네 나는야 뭉게구름 같은 숲 가녘에 안내인마냥 외따로 선 키 큰 소나무 한 그루 사랑했지만 그 나무 오징어 다리 같은 뿌리 내놓고 길게 쓰러졌네 혼자 있는 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자 무엇이든 저지르고 마는 자이네 그의 몸은 그의 몸 이기지 못해 일어나지 않는 몸 기필코 자기를 해치는 몸이네 이 독방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독방 현관문 열고 방문 열고 들어서면 더 들어갈 데가 없는 곳에 그러나 더 열고 들어가야 할 문 하나가 어디엔가 반드시 숨어 있을 것 같은 곳에 쓰러지지 않고 침묵하지 않고 기어다니지 않아도 되는 더 단단한 독방 하나, 나는 믿었지만 그 꿈 같은 감옥 불 켜면 빛 속으로 사라지고 지금, 타는 듯한 벌..
담묵에서 농묵으로 강렬하고도 차분하게 처리된 수묵화 네가 남긴 산사 같던 적요 기울어가는 저녁 그림자 너는 원근이 구분되지 않는 흐린 먹물로 거기 서 있다 정좌한 기와집들이 소리 없이 지켜보고 있는 골목 절묘하게 마무리해놓은 농담 기법, 눈 내린 뒤 쇠종 속에 갇힌 물고기 울음소리처럼 붓끝에 머물러 있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 동네가 문득 긴 잠에서 깨어나듯 기지개 켤 때 세필로 뻗어가는 골목을 따라 점 하나 찍는다 너의 형상으로 다시 되살아나는 그 점 속으로 들어가 한 점 농묵으로 섞여 번져간다 문득 목탁 소리처럼 다시 눈은 내리고 먹물 한 점이 그림 전체를 먹어 들어간다 ㅡ김은옥, 그림을 망치다ㅡ
눈사람은 온몸이 가슴이다 큰 가슴 위에 작은 가슴을 얹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토록 빨리 녹는 것이다 흔적도 안 남는 것이다 ㅡ권혁웅, 눈사람ㅡ
부모의 슬하에서 철없이 살다가 뒤늦게 만난 세상 삶이 녹록지 않음을 알았다 길목에 잠복한 불행이 불쑥 발목을 걸어 대책없이 쓰러졌다 겉과 속이 다른, 알 수 없는 내일과 숨겨둔 사람의 마음 심중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어떤 일이 내게 닥칠지 아무도 귀띔해 주지 않았다 안목을 키우려고 늦깎이로 시를 쓰고 책을 읽고 다정한 사람을 만나 뒤늦게 인생을 배운다 밤새 쓴 시 한 줄에 사람에게 다친 오답이 서서히 아물고 나와 가장 먼 곳에 있는 정답의 근처에 다가가는 중이다 ㅡ이자야, 정답의 근처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