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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형님이 돼지우리에 들어갔다 5백 근이 넘는 돼지를 잡겠다고 했다 형님은 저돌의 의미를 아는 장부였다 당숙이 큰일을 한다고 했다 기골이 장대한 형님이 시퍼런 도끼를 들고 돼지를 노려보았다 돼지도 붉게 충혈 된 눈으로 형님을 노려보았다 돼지를 이렇게도 잡나?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형님이 돼지 밑에 깔렸다 형님뿐만 아니라 마을사람들이 돼지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어른들이 달려들어 씩씩거리는 돼지를 안방으로 모셔갔다 형님은 돼지우리에 누워 슬프게 울었고 돼지는 아랫목에서 웃고 있었다 때때로 고사 상에서 기고만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돼지를 만날 때마다 돼지와 처지가 바뀐 형님이 떠올랐다 ㅡ이창수, 告祀ㅡ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엔 없었던 난 그가 연필을 내려놓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한 두어 번 부러진 연필을 깎을 때였을까 그가 연필을 들고 있을 때만큼은 언제나 바나나 같은 향기가 손에 와 잡히곤 하였다 그는 마을 어귀 가장 낮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당엔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넣었다, 그러면 나비와 새 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읽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시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인기척이라곤 낙엽 같은 노트를 찢어대는 소리일 뿐 아니, 밤보다 깊은 울음소릴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을까 난 그의 글을 읽어..
밤새 쏟아지던 비가 새벽이 되니 잠시 쉬고 있다 어둠속에서는, 빗속에서는 숨을 죽이고 있어야만 하는지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어 뚝방에 우장을 걸치고 앉아 졸음으로 세월을 보내자니 허전하기 짝이 없는데, 새벽엔 어인 고운 일로 비가 그치니 물안개로 피어오르는 환상, 날만 새면 새기 무섭게 새 세상이 열리는 참으로 뚱딴지 같은 환상 속에서 바늘을 드리운다 무엇을 걸지 알 수 없으나 떡밥 속에 바늘을 숨긴다 ㅡ임종철, 밤낚시ㅡ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 달리는 소리, 위구르,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ㅡ박정대, 음악들ㅡ
언제나 사랑에 굶주렸으되 목마름 끝내 채우지 못하였네 평생 막걸리를 좋아했고 촌놈을 자랑으로 살아온 사람, 아이들을 스승처럼 섬겼으며 흙을 시의 벗으로 삼았네 사람들아, 행여 그가 여길 뜨거든 그 이름 허공에 묻지 말고 그가 즐겨 다니던 길 위에 세우라 하여 동행할 벗이 없더라도 맛있는 막걸리나 훌훌 마시며 이 땅 어디 어디 실컷 떠돌게 하라 ㅡ배창환, 시인의 비명ㅡ
단감 마른 꼭지는 단감의 배꼽이다 단감 꼭지 떨어진 자리는 수 만 봄이 머물고 왈칵,우주가 쏟아져 들어온 흔적 배꼽은 돌아갈 길을 잠근다 퇴로가 없다 이 길은 금계랍 덧칠한 어매의 젖보다 쓰고 멀고 험하다 상처가 본디 꽃이 진 자리인 것을 ㅡ장석주, 단감ㅡ
神은 처마 끝에 주렴을 쳐놓고 먹장구름 뒤로 숨었다 빗줄기를 마당에 세워두고 이제, 수렴청정이다 산골짝 오두막에 나는 가난하고 외로운 왕이다 나, 장마비 어깨에 걸치고 언제 한번 철벅철벅 걸어다녀를 봤나 천둥처럼 나무 위에 기어올라가 으악, 소리 한번 질러나 봤나 부엌에서 고추전 부치는 냄새가 올라올 때까지 구름 뒤에 숨은 神이 내려올 때까지 나는 게으르고 게으른 사내가 되려 한다 ㅡ안도현, 장마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