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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폭풍만이 아니다 물고기들이 울어서 넘치는 것이다 발목이 젖는 게 두려운 사람들아 제 눈물에 저를 담그고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라 지진만이 아니다 바다가 울어서 넘치는 것이다 세상의 눈물 콧물을 다 훔쳐주던 억쳑어멈도 한 번쯤 슬픔에 겨워 넘치는 것이다 뭇 생명들이 처음 태어난 곳이 저 눈물속이었다 ㅡ반칠환, 해일ㅡ
꽃샘바람 속에서 우리 꽃처럼 웃자 땅속의 새싹도 웃고 갓나온 개구리도 웃고 빈 가지의 꽃눈도 웃는다 꽃샘바람에 떨면서도 매운 눈물 흘리면서도 우리 꽃처럼 웃자 봄이 와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오는 것이니 ㅡ박노해, 꽃샘바람 속에서ㅡ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ㅡ정현종, 방문객ㅡ
이 세상이 그렇게 빨리 망하진 않을 것 같다 언 땅속에서 개나리 한 뿌리가 저렇게 찬란한 봄을 머금고 있었다니 ㅡ이시영, 早春ㅡ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ㅡ신경림, 떠도는 자의 노래 ㅡ
고독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곳은 마치 바다의 문지방 같다 주름진 치마를 펄럭이며 떠나간 여자를 기다리던 내 고독의 문턱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生의 밑바닥 그곳에서 橫行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 내가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을 끝내 갈매기들이 얻어가곤 했지 모든 걸 떠나보낸 마음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렇게 넓은 황량함이 내 고독의 터전이었다니 이곳은 마치 한 생애를 다해 걸어가야 할 광대한 고독 같다 누군가 바람 속에서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생애 같다 그대여, 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 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 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절대 빠져들지 않는 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 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 사랑이..
문틈에서 드르렁드르렁 "거, 누구요?" "문풍지예요" 창밖에서 바스락바스락 "거, 누구요?" "가랑잎예요" 문구멍으로 기웃기웃 "거, 누구요?" "달빛예요" ㅡ윤석중, 가을밤ㅡ
누이야 가을산 그리매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 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매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매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송수권, 산문에 기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