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시 (920)
오자기일기
눈이 어두워 신문에 난 ‘오늘의 운세’가 잘 안 보여 자세히 보니 없어진 길에는 쉬어가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쓰여 있어 감동했다 그래 다시 한번 자세히 보니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고 쓰여 있었다 ㅡ이문길, 눈이 어두워ㅡ
이른 봄날 모처럼 시골집 마루에 일없이 걸터앉아 햇빛 쬐며 다리 건덩거리다 뜬금없이 한 생의 보람을 물으니 마루 구석에 놓인 반쯤 남은 댓병 소주가 말을 받는다 보람은 무슨 보람 낮이면 저 해님 백성으로 일하고 밤이면 달님 품에 안겨 자는 게 일이지 세상에 하고 싶은 일은 많으나 얼마나 이루기 어렵던가 또한 어렵사리 이루어도 보람은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나니 남는 것이 그 무엇이던가 가장 쉬운 일은 술 한 잔 하면서 스스로를 섬기는 일뿐 자족하고 자식들 건사나 하며 한 생애 바람찬 여울을 건너나니 보람은 무슨 보람 이제는 일없네 철없는 짓 그만두고 모처럼 한가하니 김치쪼가리에 낮술 한 잔 하시게나 ㅡ윤재철, 댓병 소주ㅡ
흐르는 물에 상추잎 씻듯 시간의 상처 씻어주는 것들, 풍경 속에 약손이 있다 우수 경칩 지나 몸 푼 강물, 초롱초롱 눈 뜬 초록별 그리고 지상으로 기어올라와 눈부신 햇살 속으로 얼굴 디밀고는 어리둥절한 지렁이의 가는 허리, 꼭 그만큼씩만 꿈틀거리는 봄날의 오솔길 등속이 피워내는 적막의 부드럽고 따뜻한 혀가 쩍,벌어진 진애의 살을 핥는다 풍경 속으로 풍경되어 걸어가면 순간의 열락으로 몸은 한지처럼 얇고 투명해진다 풍경은 붕대다 늙고 지친 생을 감고 부옇게 떠오르는, 상처 난 생활의 소음이며 거품 천천히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언젠가 새 살 돋아 가려워진 생은 풍경의 울타리를 벗어나 스스로 걸어 나올 것이다 ㅡ이재무, 풍경ㅡ
송광사 대웅전 앞에 배롱나무 한 그루 너른하게 꽃피우고 있었다 다붓한 절간 눈맛나는 붉은 꽃숭어리마다 술렁이는 꽃빛발에 대웅전 부처님은 낯꽃 피고 나는 꽃멀미로 어지러웠다 밤그늘이 조계산 기슭을 바름바름 기어내려올 때쯤이야 이곳에서는 배롱나무가 부처였음을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ㅡ허형만, 배롱나무 부처ㅡ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아라 ㅡ김용택, 봄날ㅡ
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것의 베게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 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 호마로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ㅡ김광균, 노신ㅡ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좇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 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 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ㅡ나희덕, 땅끝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