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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농 최규동선생에 대한 소고 (小考)/ 백난작

난자기 2022. 1. 22. 19:27

백농 최규동선생에 대한 소고(小考)

 

 

-백농선생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백종운

 

 

 

 

                                                                                                                               

 

우리 가천면에는 백농 최규동선생의 생가가 있다

가천에 태어나서 자라신 지역민들도 어릴적 높다란 담장으로 길게 둘러쳐진 생가를 보면서

저 곳이 최박사집이라는 사실 외에 아는 것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나이가 어느 정도 지난 후에서야 백농 선생님이 서울대 초대총장을 지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누군가의 구전을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 후 세월이 유수같이 지난 어느 날 선생의 생가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세월의 무거운 눌림으로 담장은 허물어질 듯 퇴색되었고 기와지붕이 간신히 빗물을 받아내며 쇠락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 고독하고 쓸쓸한 노인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생가의 모습이 그렇게 흉물이 되어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40년이나 지났으니 한 건물의 퇴락이 그리 이해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아픔은 허물어진 백농선생의 고매한 이념과 정신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헌신적 교육자이자 민족계몽의 선구자로 평생을 청빈하게 육영에 전념하며 독립을 위해 민족교육의 선두에 섰던 선생의 헌신적인 삶이 생가 앞마당에 낙엽처럼 뒹굴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우리는 지금 지난 세기동안 우리의 민족혼을 일깨워 주던 한 고매한 시대정신의 죽음을 방관하고 있지 않은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생의 억울한 영혼의 진혼을 위하여 백농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되짚어 보고 그것이 정의롭고 공정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백농선생의 연보

 

최규동(崔奎東, 1882~1950) 선생의 호는 백농, 본관은 영천이며 최무선의 후손 영한의 장남으로 1882(고종 19) 가천면 창천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일찍이 한학을 배운 백농은 8세에 석류나무를 보고 한시를 짓고, 10세에 이미 사서백가를 외우는 등 주위에서 신동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1897(15~16) 그간 배워온 한학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선생은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해 광신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문을 배웠다.

 

 ▲1905(23)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인재를 배양하는 것만이 장차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민족적 신념으로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워 안창호, 조정환과 함께 교편을 잡았다.

 

 ▲1909(27) 휘문, 기호, 융희, 중앙, 오성, 기명학교 등에서 후세 교육에 전념했으며, 특히 전공과목인 수학 강의는 탁월해 '최대수(崔代數)'란 이름이 장안에 널리 퍼졌다.

 

 ▲1918(36) 중동학교를 설립, 교장이 돼 민족교육기관으로서 민족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민족의 앞날을 걸머질 인재 양성에 전력했다.

 

 ▲1945(63) 해방이 되자 많은 인사들이 정치에 대한 야망에 부풀어 교육계를 떠났지만 백농선생은 꿋꿋하게 교육계를 지키며 미군정 학무국 자문기관인 한국 교육위원회 조직에 일반 교육분야 대표위원으로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공헌했다.

 

 ▲1947(65) 조선교육연합회가 결성되자 백농선생은 초대회장으로 선출되고 정기간행물 '새교육'을 발간해 전국의 교육자들이 새로운 교육사조의 이해와 폭넓은 지식 습득으로 산교육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949(67) 4대 서울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다

 

1950(68) 6.25 전쟁 중 납북되어 1018일 평양시 북구 미림이리(현 평양시 사동구역 미림동)에서 공습으로 숨을 거두었다.

 

1965년 고향인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 광봉산에 '백농 선생 영천 최공 신도비'가 세워졌고, 서울 중동학교에는 1966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1968년 정부는 평생을 청빈하게 육영에 전념하며 독립을 위해 민족교육의 선두에 섰던 선생에게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독립유공자로서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2.백농선생의 친일행적 논란

 

 

1)친일논란

 

2015년 교육부와 한국교원총연합회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우리나라 근대교육 발전에 기여한 인물을 추려 이달의 스승’ 12명을 선정했다. 이 가운데 백농 최규동(18821950) 선생은 3월의 스승으로 뽑혔다

'조선의 페스탈로치'로 불릴 만큼 '교육입국'의 신념에 투철했던 백농선생이 일제의 식민교육을 거부하고 이에 저항한 뚜렷한 자취를 남긴 공로였다

그러나 선정된 후 역사정의실천연대는 백농이 일제 관변 잡지인 '문교의 조선' 19426월호에 발표한 '죽음으로 임금(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제목의 일본어 글을 찾아내어 친일 행적을 시비하며 친일파로 규정하였다

 

2)친일논란에 대한 해명

 

논란이 일자 교육부는 해명자료를 통해 "최규동 선생은 선정위원회의 심사과정에서 친일 행적 여부를 포함해 친일인명사전 미등재 사실을 확인했다""창씨개명 거부, 조회 때 우리말 훈시, 건국훈장 추서 등 대한민국 초창기 교육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인정돼 선정됐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백농(白儂) 최규동 선생에 대해 중동고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안천 서울대 명예교수가 당시 이 글은 백농 선생 모르게 서무실 직원이 써 주었다고 증언한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특히 징병제 옹호는 백농 선생이 1949년 초대 서울대 총장에 임용될 때도 걸림돌이 되었으나 직접 쓰지 않는 것으로 해명이 되어 임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비록 해당 글이 경성중동학교장 최규동이라고 명시되어 있다고는 하나, 자발적으로 본인이 쓴 글인지, 강제에 의한 것인 지, 명의가 도용된 것인지 진위여부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부 행위를 침소봉대해 전 생애에 걸쳐 확인된 항일운동과 민족교육의 삶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공식입장을 밝혔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회장 안양옥)교총의 주장이 증언을 통해 사실로 밝혀진 만큼, 당연히 민족혼을 갖고 민족교육에 헌신한 백농 선생의 명예회복이 시급하다.”고 하면서 일제강점기하에서 항일운동과 민족교육을 위해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조선어를 금지하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우리말 수업을 고수, 조회 때마다 우리말 훈시를 통해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신 백농 선생의 실추된 명예가 조속히 회복되길 기대한다.”고 하였다.

 

 

3.백농선생 재평가의 당위성

 

1) 역사서술과 가치판단

 

역사란 현재시점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과거의 사건들을 재구성하고 평가하여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기록하는 서사라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기록되는데 이때 역사가의 주관적 평가와 해석이 부가된다는 것이다

20세기초 영국의 역사학자인 에드워드.H.카는 역사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다.

만약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기록할 가치가 있는 사실인지 역사가는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했다

따라서 역사는 그것을 기록하는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 밖에 없으며 역사를 기록하는 시점의 사회환경이나 역사가 개인의 경험, 기질,이념 등이 자연스럽게 기록물에 녹아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점에서 유시민작가의 역사의 역사에 수록된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역사를 살펴보자

하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이고 다른 하나는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이다

아래의 글은 에드워드.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서문을 이해하기 쉽게 우리의 고대사를 사례로 작성된 문장인데, 이 글이 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전혀 다른 평가와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12세기 전반 고려의 고위관직을 지낸 김부식은 중국 송나라의 문물과 유학사상을 추종했던 지식계급의 열망을 드러냈다

그는 북벌과 천도를 주장했던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신라 김춘추와 김유신을 경세가와 명장으로 그려냈고,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한 신라의 행위에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삼국시대 역사를 서술했다

김부식이 발해의 역사를 삭제하고 당나라와 맞서 싸웠던 복신의 백제부흥투쟁을 무시한 것은

당시 고려 조정의 유학자 집단이 사대주의 사상에 사로잡혀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해도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였던 신채호는 3.1운동이 참혹한 패배로 끝난 것을 보고 비폭력운동의 한계를 느꼈다.

일제 병탄시기부터 1928년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글을 썼던 그는 조선민족의 정치적 열망을

실현할 강력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을 이상적인 민족영웅으로 묘사한 것이 조선을 일제 강점기에서 구해낼 강력한 무장투쟁 지도자에 대한 열망의 산물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신라의 삼국통일 군사지도자였던 김유신을 음모와 책략의 대가이자 자신의 전공(戰功)을 조작한 거짓말쟁이로 그린 것이 김춘추와 김유신을 민족의 정신에 사대주의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역사 서술에 대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역사는 사실의 토대에서 기록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나 인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 삼국통일을 이룬 김춘추와 김유신,묘청의 난, 당나라, 고려, 3.1운동 등의 인물과 사건들은 과거의 기록이나 문헌에 명백히 존재하는 것으로 누구도 반박을 하지 못하는 사실들이다. 역사가는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이다

 

둘째 같은 사실을 가지고 역사를 쓰더라도 어떤 관점에서 씌여지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조선상고사에서나 김유신에 대한 객관적 사실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역사가 김부식과 신채호의 사실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점의 차이가 영웅 김유신과 음모와 책략이 능한 교활한 김유신의 차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셋째 역사는 현재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과거는 현재의 역사가에 의해 재조명되어 역사는 진보해 간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의 인물인 김유신을 고려시대의 눈으로, 일제강점기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대상에 대한 인식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만큼 역사를 기술하는 시대적환경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열망을 조장하고

역사는 그러한 열망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기술된다는 것이다

 

 

2) 백농선생 재평가의 당위성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과거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를 한 가지 기준으로 평가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험난한 일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인간 개인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개인의 생애와 신념, 업적 등의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분석 위에서 진중한 가치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백농선생의 올바른 평가를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까지 살아온 선생의 일대기를 통시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적 공과를

다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본 논고를 위해 백농선생에 관한 사료를 조사해 보았다.

안타깝게도 친일인사라는 낙인 때문인지 선생에 대한 자료가 전무하다시피 하였고

인터넷이나 보도자료를 통해 입수한 자료들을 토대로 사실들을 조사 할 수 밖에 없었다

‘1.백농선생의 연보는 위키백과에서 수집하였고 ‘2.백농선생의 친일논란역시 인터넷에서 발췌한 신문기사들 참조하였다

그러나 연보에 기록된 내용이나 친일논란 자체는 사실이 왜곡되었다거나 허위 기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위키백과의 작성방식이 한사람에 의해 일방적으로 작성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상의 여러 사람이 잘못 작성된 것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류로 작성이 되면

즉각 수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내용들이 모두 역사적 평가에 흠이 없는 사실이라고 전제를 하고 백농선생에 대한

친일논란에 대한 반론을 해 본다

 

일제 관변잡지인 문교의 조선(19426)’에 징병제 옹호의 글을 게재할 당시 선생의 나이가 60세였다. 연보에서 보다시피 선생은 청년기부터 60세가 되기 전까지 민족계몽의 선구자로 독립을 위해 민족교육을 위해 고군분투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왜 1942년 갑자기 징병제를 옹호하는 글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 당시 60세라는 나이는 결코 작은 나이가 아니며 평생을 지켜온 민족계몽과 교육의 신념이

하루아침에 헌신짝 버리듯 버릴 수 있는 것인지, 만약에 그랬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혹자는 대필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혹자는 강압에 의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그들의 주장일 뿐 그것을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는 없다

반면 문교의 조선(19426)’에 징병제 옹호의 글은 잡지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어 명확한

증거가 된다. 그래서 백농선생이 친일파라고 매도되고 있는 것이다

말년에 기고한 한 편의 잘못된 글로 선생의 전 생애를 덮어버리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묻고 싶다

 

히포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 시대 의사이고,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기록은 매우 뒤섞여 있기 때문에 그가 진짜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록했는지, 행동했는지는 매우 적게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히포크라테스는 고대 의사의 전형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 그가 생리중인 여성과 눈만 마주쳐도 병을 옮길 수 가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여성혐오 발언으로 당장 페미니스트나 여성들에게 동상이 허물어지고 재판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새로 배출되는 의사들에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헌사 받으며 추앙을

받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이해되어질까?

그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여성들에 대한 지위가 낮았고 여성들의 생리에 대한 지식 또한

부족했던 터라 누구도 그에 대해 반박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터무니 없는 일이지만 그것보다 히포크라테스가 서양의 의학부문에서

지대한 공헌이 있었기에 지금까지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존경을 받는 인물로 남아 있다

 

히포크라테스와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백농선생은 그토록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정신과

민족의 교육을 위해 헌신했으며 해방 후 우리나라의 근대교육의 초석을 다진 인물임이 틀림없음에도 일제 말기 징병제 옹호의 글 때문에 친일파의 프레임에 덧씌워져 있다

물론 한 인물의 행적을 밝혀 그 공과를 따지는 일은 가치 있고 온당한 일이다

그러나 밝혀진 사실 일부만 가지고 그의 생애 전체를 판단하고 재단하고 평가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고 특히 역사적 인물의 평가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드러난 사실이라고 해서 그것이 꼭 진실이라고 믿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역사는 수많은 사실들 중에 드러난 일부만으로 기록된다. 만약 드러나지 않은 사실들이 더 진실에 가깝다면 역사는 왜곡이 일어난다

역사가 왜곡되어 한 고귀한 삶이 역사의 단죄를 받고 역사의 뒤안길에 내팽개쳐 지는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그 민족의 역사의 진보는 없다고 본다

역사정의실천연대의 백농선생의 친일논란도 그러한 역사적 소명감을 갖고 제기된 것이라고 믿지만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이 미흡한 상황에서 신중하지 못한 판단이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차제에 이러한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백농선생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며 그것이 역사정의를 진실로 바로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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