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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ㅡ이문재, 마음의 오지ㅡ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非文의 사랑을 완성..
너, 거기 피어 있었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봄바람은 내 작은 꽃 속에서 불고, 가난해도 꽃을 피우는 마음 너 아니면 누가 또 보여주겠느냐 이 세상천지 어느 마음이 ㅡ김형영, 변산바람꽃ㅡ
네 집에서 그 샘으로 가는 길은 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물 길러 가는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지요 서로 짠 일도 아닌데 새벽 제일 맑게 고인 물은 네 집이 돌아가며 길어 먹었지요 순번이 된 집에서 물 길어 간 후에야 똬리 끈 입에 물고 삽짝 들어서시는 어머니나 물지게 진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지요 집안에 일이 있으면 그 순번이 자연스럽게 양보되기도 했었구요 넉넉하지 못한 물로 사람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던 그 샘가 미나리꽝에서는 미나리가 푸르고 앙금 내리는 감자는 잘도 썩어 구린내 훅 풍겼지요 ㅡ함민복, 그 샘ㅡ
갓 지었을 적엔 서로가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 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 구나 ㅡ이재무, 밥알ㅡ
더 잃을 것이 없어지느라 배도 몇 번 째본 내가 기고만장해서 여기가 바닥인가 중얼거리면 예, 거기가 바닥입니다 누가 발밑에서 답한다 내 무덤 아래에 늘 다른 무덤이 있다 ㅡ이영광, 바닥ㅡ
우리 어머니 눈 감기 사흘 전에 곡기 딱 끊으셨다 몸부터 깨끗이 비워낸 뒤 평생의 외로움과 일체의 미움 버리고 비로소 깊은 단잠에 드셨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평온한 얼굴로 ㅡ고증식, 아름다운 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