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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사방 개 짖는 소리 요란하다 사는 일이 쉬운 적 있었던가 한 고개를 넘어서면 다시 버티고 서있는 산, 수시로 바윗덩이 굴러 내려와 나를 주저앉혔네 늘상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들은 등 뒤를 치거나 목에 박힌 가시처럼 따끔거렸네 삶이 주는 최고의 상은 가치 없는 일에 맹목이 되는 것 성성한 가시는 온몸에 꽃처럼 푸르게 돋아나고 빛은 내가 모르는 지름길로 빠르게 지나갔네 가장 두껍고 단단한 어둠이 깃발 들고 나를 점령하고서야 비로소 광막하고 경이로운 나를 알아차렸네 귓속에 별빛 터지는 소리, 오래 욱신거렸네 ㅡ도혜숙, 지천명ㅡ
그 여름 한 산이 무너졌다 부서진 산의 파편들이 나를 지나며 흙 속에 얽힌 뿌리며 갈퀴넝쿨의 음표를 내게 던진다 오늘 내 계곡에 풀이 자란다 산이 소리치며 흘러간 벼랑에서 다시 산이 될 듯 우거지지는 나의 숲 우렁우렁 현을 고르는 저 침묵들 내게 술잔은 그대로이고 테이블도 의자도 얌전한 오늘 저녁 턱밑까지 뻗어오는 뜨거운 무리들 부서지며 부풀어오르는 이 붉은 흙 그때 그 노래다 폭발하는 초록들이다 ㅡ정복여, 다시 여름산ㅡ
누가 승강기 안에다 똥을 눴다 똥 덩어리가 내 주먹보다 더 컸다 경비실에 가서 이야기했더니 경비 아저씨가 똥을 치웠는지 나중에 보니 똥은 보이지 않고 대신에 승강기 안 게시판에 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ㅡ경비실에서 알립니다ㅡ 오늘 어느 분이 승강기 안에다 누렇게 잘 익은 똥 한 덩어리를 빠뜨리고 그냥 내리셨는데, 경비실에서 잘 보관하고 있으니 주인 되는 분은 꼭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음 날 궁금해서 물어보니 똥 찾으러 온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자기 똥은 자기 뱃속에 잘 간직하고 있다가 버릴 때가 되면 화장실 변기통에다 버려야 그게 바른생활 사람이다 ㅡ권오삼, 똥 찾아 가세요ㅡ
이제 알지 계단은 오를 때마다 내릴 때 더 힘이 든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열광이 식는다 역사가 계단이어서가 아니다 오르막이 있었다면 이토록 숨차지 않으리라 물려주어야 할 무게 때문이다 고층건물도 뒤집어보면 계단이다 내가 따르고 네가 앞서간다 ㅡ김정환, 희망의 나이ㅡ
난 요새 별을 보면 뭔가 배경이 있는 것 같아 뭔가 어긋나고 있거든 그게 맞는 것 같아 그리고 진실은 항상 참담한 것 이상으로 위안이 되지 어긋난다는 것 그리고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게 의미인 것 같아 죽음 앞에서는 빛의 속살이 어둠이고 어둠의 속살이 따스한 기쁨 아닌가 ㅡ김정환, 별ㅡ
버드나무 아래서 기다래지는 생각 버드나무는 기다리는 사람이 타는 그네 참새 무덤을 만든 사내가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새가 되려다 실패한 고양이의 눈 속엔 비밀이 싹튼다 허방과 실패로부터 도망가는 지네의 붉은 등 소문이 무성해지는 힘으로 봄은 푸르고 변심을 위해 반짝이는 잎사귀들이 버드나무를 무겁게 누르는 오후 여름은 승리가 아니다 흔들리는 것은 죽은 참새와 그네 위 기다래지는, 생각 버티어야 할 것은 버틸 수 없는 것들의 등에 기대 살기도 한다 ㅡ박연준, 고요한 싸움ㅡ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人家를 내려다 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 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 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 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오르고 生木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ㅡ이기철, 청산행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