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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그 옛날 내 친구를 미치도록 짝사랑한 나의 짝사랑이 배 두 상자 보내왔네 그 속에 사연 한 장도 같이 넣어 보내왔네 화들짝 뜯어보니 이것 참 기가 차네 종문아 미안치만 내 보냈단 말은 말고 알 굵은 배 한 상자는 친구에게 부쳐줄래 우와 이거 정말 도분 나 못 살겠네 에라이 연놈들의 볼기라도 치고픈데 알 굵은 배 한 상자를 미쳤다고 부쳐주나 이종문 / 미쳤다고 부쳐주나
세월은 가고 세상은 더 헐벗으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새들이 아직 하늘을 날 때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무슨 터질 듯한 立場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동안 나그네 흐를 길은 이런 거지 저런 거지 같이 가는 길 어느 길목이나 나무들은 서서 바람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데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이 乞神을 섬기는 동안 하늘의 눈동자도 늘 보이고 땅의 눈동자도 보이니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동안 ㅡ정현종, 가객ㅡ
매일같이 내 속에는 자꾸 山이 생긴다 오르고 싶다고 생각만 하면 금세 山이 또 하나 쑥 솟아오른다 내 안은 그런 山으로 꽉 차있다 갈곳산, 육백산, 깃대배기봉, 만월산, 운수봉… 그래서 내안은 비좁다 비좁아져 버린 나를 위해 山을 오른다 나를 오른다 간간이 붙어있는 표식기를 찾아가며 나의 복숭아 뼈에서 터져 나갈 것 같은 장딴지를 거쳐 무릎뼈로 무릎뼈에서 허벅지를 지나 허리로 그리고 어렵게 등뼈를 타고 올라 나의 영혼에까지 더 높고 거친 나를 찾아 오른다 기진맥진 나를 오르고 나면 내 안의 山들은 하나씩 둘씩 작아지며 무너져 버린다 이제 나는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있다 나를 비울 수 있다 ㅡ최영규, 나를 오른다ㅡ
길에는 사람들이 먹고 버린 여름과일 껍질들이 아직 그대로 남았고 또한 우리들이 먹고 버린 청량음료병들도 뒹군다 입추 무렵 되새겨보노니 지난 여름은 무더웠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선선하다 바람이 불면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흔들리고 이 도시를 둘러싼 먼산들도 멀리서 뚜렷하게 바라보인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무더웠다 그러나 오늘 저녁은 선선하다 바람이 불면 키우던 집의 개도 털이 흔들리고 개는 한곳에서 웅크리고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가 기다렸던 것은 이런 선선함인가 이런 날에는 우리들의 생은 더욱 외로워진다 우리들의 생은 더욱 쓸쓸해진다 도시의 뒷골목을 혼자 걷다가 우두커니 옥상에 혼자 서봐도 우리가 정녕 잊어버리려 했던 것은 지난 여름의 무더위만이 아니었던 것을 깨닫는다 이런 날에는 아침 저녁으로 바람은 선선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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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ㅡ윤동주, 바람이 불어ㅡ
해가 지는 곳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나무가 움직이는 곳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엄마가 담근 김치의 맛이 기억나지 않는 것에 대해 형이 슬퍼한 밤이었다 김치는 써는 소리마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고 형이 말했지만 나는 도무지 그것들을 구별할 수 없는 밤이었다 창문이 있는 곳에서 어둠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달이 떠 있어야 할 곳엔 이미 구름이 한창이었다 모두가 돌아오는 곳에서 모두가 돌아오진 않았다 ㅡ임경섭, 처음의 맛ㅡ
가출이 아닌 출가이기를 바란다 떠나온 집이 어딘가 있고 언제든 거기로 돌아갈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돌아갈 집 없이 돌아갈 어디도 없이 돌아간다는 말을 생의 사전에서 지워버린 집을 버린 자가 되길 바란다 매일의 온몸만이 집이며 길인, 그런 자유를...... 바란다, 나여 ㅡ김선우, 민달팽이를 보는 한 방식ㅡ
개심사 가는 길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 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 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改心하였을까 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平心의 바닥 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 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느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 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저 고요의 영역 표시 경계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放心 뒤에 진저리치던 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 하물며 開心이라니! 그 구멍의 뿌리 모두 바닥에 닿아 있으므로 길은 불평의 바닥이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