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시 (920)
오자기일기
오래된 짐꾸러미에서 나온 네 빛바랜 편지를 나는 도무지 해독할 수가 없다 건포도처럼 박힌 낯선 기호들, 사랑이 발명한 두 사람만의 언어를 어둠 속에서도 소리내어 읽곤 했던 날이 있었다 그러나 어두운 저편에서 네가 부싯돌을 켜대고 있다 해도 나는 이제 그 깜박임을 알아볼 수 없다 마른 포도나무 가지처럼 내게는 더 이상 너의 피가 돌지 않고 온몸이 눈이거나 온몸이 귀가 되어도 읽을 수 없다 오래된 짐꾸러미 속으로 네 편지를 다시 집어넣는 순간 나는 듣고 말았다 검은 포도알이 굴러떨어지는 소리를
사회과부도를 보며 생각하지 내 꿈은 바다처럼 넓은 바이칼 호수에 가는 것 북극 빙하물이 녹아 흐르는 물은 여름에도 얼음처럼 차다는데 그 물에 발을 담그는 것 바다처럼 깊은 호수 물이 짜지 않다면 정말 짜지 않다면 내 어항 속 금붕어를 풀어놓고 싶을 거야 바이칼 호수 옆에 사는 친구를 만나면 바이칼 호수같이 넓은 서해 바다를 보여주는 것 바다를 본 적 없는 그 친구, 그 넓은 물이 온통 짜다는 걸 알면 뒤로 넘어가겠지 내 꿈은 그래, 바이칼 호수에 가는 것 바이칼 순환열차를 타고 호수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보는 거야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아직 불기가 남아있는지 그대의 아궁이와 굴뚝에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지 잡탕 찌게백반이며 꿀꿀이죽인 나의 사랑 한 사발을 들고서, 그대 아직 연명하고 계신지 그대 문간을 조심히 두드려봅니다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댓국밥을 먹었다 순댓국밥 아주머니는왜 혼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
우리 관군이 육전에서 패배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 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 일본 함대를 격멸시켜 전세를 역전시키고 있었다 4번타자 김봉연이 타석에 들어서자 관중들은 함성을 지르며 묵묵히 걸어나갔다 최류탄 가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 그들은 콘돔이나 좌약식 피임약을 상용하였으므로 대부분의 아이들이 외동아들이거나 외동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면은 퉁퉁 불어 있었다 정확히 물을 3컵 반 재어서 부어넣었는데, 어떻게, 면발이 퉁퉁
그를 알거나 몰라도 된다 그는 우연히 거기에 있거나 여기에 없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는 벌써 죽었거나 아직 살아 있을 것이고 구십수 프로의 불행과, 일 프로의 행운으로 자자할 것이 뻔하다 부지런히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면서 뒤를 돌아보거나 갈 길을 재촉했을 그는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 만큼 도무지 쉽게 잊히기도 해서 그의 행방은 도처이되 종적은 묘연하다 그는 전대미문이고 파란만장이며 우르르 몰려가는 아침이었던가 울컥 쏟아지는 밤이기도 한데 가늠키 어려운 안부와 형언키 어려운 풍문 속에 얼핏얼핏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는 그는 여차하면 과거가 되어버리기 십상이어서 그가 거기에 있든 여기에 없든 죽었든 살았든 그는, 끝까지 그여야 하겠지만 굳이 그가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비 갠 하늘에서 땡볕이 내려온다 촘촘한 나뭇잎이 화들짝 잠을 깬다 공터가 물끄러미 길을 엿보는데, 두살배기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간다 생생한 생(生)! 우주가 저렇게 뭉클하다 고통만이 내 선생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몸 한쪽이 조금 기루뚱한다 바람이 간혹 숲 속에서 달려나온다. 놀란 새들이 공처럼 튀어오르고, 가파른 언덕이 헐떡거린다 웬 기(氣)가 ― 저렇게 기막히다 발밑에 밟히는 시름꽃들, 삶이란 원래 기막힌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다시 숨을 쉬며 부푼다 살아 붐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