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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모든 꽃 시들고 모든 젊음 세월에 밀려나듯 삶의 모든 단계, 모든 지혜, 모든 미덕도 한때는 만발하되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삶의 단계마다 마음은 이별하고 새로이 출발할 채비를 갖춰야만 한다 슬픔 없이, 담대하게, 새로운 얽매임에 몸을 던질 채비를. 모든 시작에는 마법이 깃들어 있나니 그것이 우리를 지켜주고 살아가도록 돕는다 우리는 그 단계 사이의 공간을 유쾌하게 가로질러야 하리 그 어떤 공간도 고향인 양 집착하지 말고 시대정신은 우리를 묶거나 옥죄려 들지 않는다 우리를 한 단계, 한 단계 들어 올리고 넓히려 할 뿐. 삶의 순환 속에서 우리는 눌려 사는 법이 없으니 아늑하게 적응하면 금세 해이함이 치고 들어온다 자리를 박차고 떠날 준비가 된 자만이 마비된 채 자리를 지키는 익숙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
멍게는 다 자라면 스스로 자신의 뇌를 소화시켜버린다 어물전에선 머리 따윈 필요 없어 중도매인 박 씨는 견습인 내 안경을 가리키고 나는 바다를 마시고 바다를 버리는 멍게의 입수공과 출수공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지난 일이여 나를 가만두지 말길 거대한 입들이여, 허나 지금은 조용하길 일몰인 지금은 좌판에 앉아 멍게를 파는 여자가 고무장갑을 벗고 저녁노을을 손바닥에 가만히 받아보는 시간
직진금지 표지판 앞에서 그대로 내달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보고 살라고 말했지만 쳐다본 곳까지 오르지 못한 채 엄나무뿌리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 긴 시간 아버지는 세 시 방향 나는 아홉 시 방향으로 꺾어져 서로 다른 곳을 쳐다봤다 간혹 여섯 시 방향을 향해 돌아섰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라기보다 화석처럼 굳어버린 혈연의 회한을 확인할 뿐이었다 생각과 몸은 바뀌어 갔으나 열두 시 방향에서 만난 적은 없다 아버지가 생의 간판을 접고 폐업하는 순간에도 나는 등을 돌리고 울었다 산다는 건 그냥 어디론가 움직이는 일이란 걸 알았지만 경험의 오류를 너무 확신했다 어쩌다 녹슨 족보에서나 쓸쓸하게 발견될 이름들이 숱한 금기 앞에서 내버린 시간 껴안지도 돌아보지도 못한 채 너무 오래 중심을..
Whose woods these are I think I know. 이 숲의 주인을 나는 알 것 같다 His house is in the village though; 그러나 그의 집은 마을에 있어 He will not see me stopping here 자기 숲에 쌓이는 눈을 To watch his woods fill up with snow. 나 여기 서 바라봄을 그는 모르리. My little horse must think it queer 나의 작은 말도 이상하게 생각하리 To stop without a farmhouse near 근처에 농가도 없는 곳에 멈추는 나를, Between the woods and frozen lake 한 해의 가장 어두운 저녁 The darkest evening of th..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똑 닮은 돌멩이 두 개 크기도 같고 모양도 재질도 같은데 무게만 다르다 갸우뚱 삶을 잰 때문일까 ㅡ박종인, 저울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ㅡ황지우, 겨울 산ㅡ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