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시 (920)
오자기일기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eOSn2t/btryt43Rj0x/QGy32SZFiVX0QekatMiMAk/img.png)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 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靈感이여 ㅡ김수영, 봄밤ㅡ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dmbTJO/btrxivA4v3a/RfypZq7tLEspCIrMTK2OX1/img.png)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Q4KSc/btrwGjoCWGX/1aHWWsUBudKcmkZL3AjaK0/img.png)
철 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 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 오름을 적셔 주었다 무너져 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 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 방면으로,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포옴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 속에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 누군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이 너무 뻑뻑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무도 없는데 아궁이 앞이 환하다 ㅡ장석남, 새떼에게로의 망명ㅡ
비 오는 가을 오후에 정신과 병동은 서 있다 지금 봄이지요, 봄 다음엔 겨울이 오고 겨울 다음엔 도둑놈이 옵니다 몇 살이냐고요? 오백두 살입니다 내 색시는 스물 한 명이지요 고시를 공부하다 지쳐버린 튼튼한 이 청년은 서 있다 죽어가는 나무가 웃는다 글쎄, 바그너의 작풍이 문제라니 내가 웃고 말밖에 없죠 안 그렇습니까? 정신과 병동은 구석마다 원시의 이끼가 자란다 나르시스의 수면이 비에 젖어 반짝인다 이제 모두들 돌아왔습니다 추상을 하다, 추상을 하다 추상이 되어버린 미술 학도, 온종일 백지만 보면서 지겹지 않고, 가운 입은 피에로는 비 오는 것만 쓸쓸하다 이제 모두들 깨어났습니다 ㅡ마종기, 정신과 병동ㅡ
한 생을 활활 불태우고 마지막 떠나는 날 털 끝 하나 흩어지지 않은 몸 오롯이 여미고 빨간 입술로 뚝 떨어지는 너 동백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