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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내 안에 구멍을 파는 자가 있다 행복한 세상으로 가자 ‘행복한 세상’에서 찾고 찾은 싸구려 행복은 거절당했다 구멍은 구멍을 넓혀가고 있다 해 아래 새것들이 넘쳐난다 눈 뜨면 새 기호들이 구멍 내는 세상 살아남기 위해, 이기기 위해, 지배하기 위해 다른 구멍의 구멍을 욕망한다 떠내려간다 내 발로 끝까지 걸을 수 없다 좁은 바지통에서 넓은 바지통으로 해체시에서 회귀하는 서정시로 설왕설래하는 독을 앓는다 구름악기로 신성을 노래해도 둥치에 핀 벚꽃 웃음을 건네도 구멍은 다른 구멍을 욕망할 뿐이다 캄캄 밤이 두른 신음밖에는 비 맞아 녹슨 꿈밖에는 사랑하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밖에는 구멍은 구멍을 고백하지 않는다 ㅡ정영선, 구멍의 고백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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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 삼천포, 삼천포 세상 모든 벌거벗은 나무들이 들뜬 걸음으로, 봄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이월, 늑골 깊숙이 숨어 있는 삼천포를 가만히 불러내어 본다 햇살처럼 투명한 해풍처럼 부드러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산다화 같은 내 사랑 삼천포, 삼천포, 삼천포 아침 햇살이 집집마다 균등하게 부족함이 없이 내리고 있을 잘게 부서지는 파도 위로 거칠게 부서져서 따사로워진 마음의 수면들 위로 넙치 빛 저녁 햇살이 16분 음표마냥 통, 통, 통 튀고 있을 삼천포에 가면 삼천포에 갈 수 있다면 충무, 마산, 진해 그 언저리에서 헤매다가 뒷걸음질 치며 돌아오고 마는…… 내 마음이 남쪽을 바라 길게 목을 내밀고 있다 ㅡ최서림, 삼천포에 가면ㅡ
“나에게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어리석은 것과 지혜로운 것,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식별하는 잣대가 있다. 좋은 것으로 나쁜 것을 만드는가 나쁜 것으로 좋은 것을 만드는가. 단순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가 복잡한 일을 단순하게 만드는가. 물질의 심장을 꽃피워내는가 심장을 팔아 물질을 축적하는가. 최고의 삶의 기술은 언제나 가장 단순한 것으로 가장 풍요로운 삶을 꽃피우는 것이니. 하여 나의 물음은 단 세 가지다. 단순한가 단단한가 단아한가. 일도 물건도 삶도 사람도.” - 박노해,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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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지 못한 표면을 대패로 민다 푸성귀들의 발자국을 찍고 이파리의 실핏줄을 받아내기 위해 나무도마를 만든다 나무도마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다 횡단면과 절단면을 찾을 수 있을까 플라스틱 도마를 분리수거함에 넣으며 함께 젖어보지 못했던, 다 같이 쩔쩔매보지 못했던, 반지르르한 거부의 순간들을 반성한다 나무의 숨소리를 결결이 밀어서 둥근 도마를 만들어야지 칼날의 흔적조차도 그대로 묵인하는 나무도마를 만들 거야 ㅡ김영희, 나무도마를 만들다ㅡ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ㅡ조오현, 아득한 성자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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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황 든 소는 캄캄한 밤 하얗게 지새며 우엉우엉 운다 이 세상을 아픈 생으로 살아 어둠조차 가눌 힘이 없는 밤 그 울음소리의 소 곁으로 다가가 우황주머니처럼 매달리어 있는 아버지 죽음에게 들킬 것 훤히 알고도 골수까지 사무친 막부림 당한 삶 되새김질하며 우엉우엉 우는 소 저처럼 절벽울음 우는 사람 있다 우황 들게 가슴 치는 사람 있다 코뚜레 꿰고 멍에 씌워 채찍 들고서 막무가내 뜻을 이루려는 자가 많을수록 우황 덩어리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 많다 우황 주머니 가슴에 없는 사람 우엉우엉 우는 소리 귀담지 못한다 이 세상을 소리내어 우엉우엉 울지 못한다 ㅡ최창균, 소ㅡ
세월로부터 한 살 한 살 근근이 수확하는 나이를 평범에 갖다 바치다 소작농이 그의 지주에게 으레 그리하듯 그러나 나의 나이여, 평범의 지주에게 갚는 빚이여, 지주의 눈을 피한 단 한 줌 이 손아귀 안의 움켜쥠을 허락해주지 않으련 ㅡ이선영, 평범에게 바치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