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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그 물들 그냥 흘러간 게 아니었구나 닳아지는 살 대신 그가 입혀주고 떠나간 푸른 옷 한 벌 내 단단한 얼굴 위로 내리치며 때때로 어루만지며 지나간 분노와 사랑의 흔적 물속에서만 자라나는 물속에서만 아프지 않은 푸른 옷 한 벌 ㅡ나희덕, 이끼ㅡ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ㅡ이성선, 미시령 노을ㅡ
작은 날개로 길을 다 지우고 가버려서 그가 떠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가지 위에 떨림 하나 그것도 잠깐만에 사라졌다 그의 삶 不立文字 황홀한 鳥道 ㅡ이성선, 鳥道ㅡ ※不立文字 불립문자는 선의 종지를 표현하는 어구인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 가운데 일구로서 일반적으로 교외별전의 일구와 함께 언급된다. 문자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말은 언설과 문자를 활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언설과 문자가 지니고 있는 형식과 틀에 집착하거나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뜻이다.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자재하게 활용하는 선의 입장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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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 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ㅡ이성선, 문답법을 버리다ㅡ
삼십년 지난 오늘 이제야 비로소 깨닫느니 내가 염소를 내다판 게 아니라 염소가 나를 대처에 내다판 걸 알았다 간재재 넘어 삼십여 리 길 팔려가는 낌새를 알아차린 듯 거품 물고 버티며 울부짖던 염소를 판교장에 끌고 가 헐값에 팔았다 이 고달픈 生을 어디에 안녕히 부려놓지 못하고 세월의 볼모처럼 덜미 잡힌 채 날마다 헐레벌떡 끌려온 내가 굴레 쓴 염소임을 알았다 ㅡ임영조, 염소를 찾아서ㅡ
살다 살다 그깟 마스크를 사려고 약국 앞에 줄을 설 줄이야 그래도 고맙다 신통한 부적처럼 우환을 막아줘서 고맙고 속이 다 내비치는 안면을 가려줘서 고맙고 세수를 안 해도 사람들이 모르니까 더 고맙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육이오 동란까지 겪고 또 겪고 살다 살다 마스크 대란이 올 줄이야 저들은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는 벌레 군단 국경도 인종도 가리지 않는 인류 침공에 어벤저스 슈퍼히어로들도 속수무책인데 귓바퀴가 없으면 걸 데도 없는 저 손바닥만 한 천 조각이 지구를 구할 줄이야 모든 화는 입으로 들어온다기에 쓸데없는 말 안 하고 나를 아끼고 남을 존중하며 마스크와 한철 보내고 나니 아무래도 내가 좀 커진 것 같다 나라도 이전의 나라는 아닌 것 같다 ㅡ이상국, 마스크와 보낸 한 철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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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ㅡ정희성, 가을날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