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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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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쓰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쓰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살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ㅡ손현숙, 팬티와 빤스ㅡ
대형 콘크리트 수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 겨우 알겠다 흐린 물 아래 도다리란 놈들 납작납작 붙은 게 아닌가 큰 짐승의 발자국 같은 것이 무수히 뚜벅뚜벅 찍혔다 바다의 끊임없는 시퍼런 활동이, 엄청난 수압이 느리게 자꾸 지나갔겠다 피멍 같다 노숙의 굽은 등 안쪽 상처는, 상처의 눈은 그러니까 지독한 사시 아니겠느냐 들여다 볼수록 침침하다 내게도 억눌린 데마다 그늘져 망한 활엽처럼 천천히 떨어져나가는, 젖어 가라앉는, 편승하는 底意가 있다 당신의 비애라면 그러나 바닥을 치면서 당장, 솟구칠 수 있겠느냐, 있겠느냐 ㅡ문인수, 도다리ㅡ
벌건 대낮 꼭지까지 취해버린 칸나 꽃대가 돌아서서 울컥 속엣것을 토해내는 순간 차가운 도마뱀 꼬리가 휘익, 발등을 스쳐 지나 갔다 ㅡ이인원, 여우비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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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여름날 저녁 칼국수 반죽을 밀었다. 둥글게 둥글게 어둠을 밀어내면 달무리만하게 놓이던 어머니의 부드러운 흰 땅. 나는 거기 살평상에 누워 별 돋는 거 보았는데 그때 들에서 돌아온 아버지 어흠 걸터앉으며 물씬 흙냄새 풍겼다 그리고 또 그렇게 솥 열면 자욱한 김 마당에 깔려……아 구름 구름밭, 부연 기와 추녀 끝 삐죽히 날아 오른다. 이 가닥 다 이으면 통화가 될까. 혹은 긴 긴 동앗줄의 길을 놓으며 나는 홀로 무더위의 지상에서 칼국수를 먹는다. - 칼국수, 문인수 -
한 사내가 내 방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나보다 몇 살 아래인 그 사내. 신문을 보며 나의 아내를 불러 커피를 시키고, 아내는 상냥한 대답으로 시중을 든다. 내가 방에 있는데도 아내나 그 사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한다. 나는 들키지 않으려고 방구석 피아노 뒤에 숨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만 보고 있다. 아이들이 학원에서 돌아와 그 사내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나는 지금 이 방에 있으되 나의 不在에 대하여 고민을 한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사내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걸치고 TV를 보고 있다. 나도 그 옆에서 아내가 깎아 놓은 사과를 깨물며 TV를 곁눈으로 보고 있다. 아이들이 각각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그 사내는 아내와 깊은 섹스를 한다. 다시 나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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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전이란 말이 설핏한 비감으로 다가오는 고산생가, 초승달이 걸렸다 高山이 孤山인 줄 눈치 챈 사람끼리 멍울진 가슴을 맞대고 점층법으로 밀물진다 먹물처럼 번지는 외로움 고봉으로 안아 월궁을 짓겠다? 준령을 가슴에 앉히려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겠으나 비워지지 않는 뚝심이 가파른 산을 오른다 얽히고설킨 길, 우뚝한 능선 하나 아름답게 걸던 사람들은 다 앞서 갔다 남은 자들만 모르는 길을 더욱 깊게 하는 밤, 고산에 걸린 달이 차겁게 맑다 달 속 여의주가 박힌 현인의 눈 짚힐듯 말듯 하였다 이미 오래 전 경전을 작파하고 달 속으로 들어간 사람, 나오지 않는다 땅 위의 집들은 이지러지며 그 이유를 쓴다 풀벌레가 애면글면 어둠을 우는데, 알 것 없다 산중의 어부가 고기를 낚아 무어하려고? 그저 五友나 벗하며 사..
석박사 약국에 약을 사러 갑니다 동네에서도 소문난 석박사 약국 발 디딜 틈 없는 사람들로 북적댑니다 모두 박사님의 환자들입니다 만병통치한다는 마법의 약, 독감을 녹이고 홧병을 녹이고 우울증을 녹인다지요 힐끗 나를 한 번 훑어본 박사는 재빨리 조제실 너머로 사라집니다 또닥또닥 무언가를 떨어뜨려 빻기도 하고 갈기도 하는 박사의 익숙한 손끝에서 내가 한 번도 듣지 못한 성분들이 배합됩니다 창가에서는 아스파라거스가 피고 완두콩이 열립니다 출처가 꼬인 덩굴손이 남남쪽으로 뻗어갑니다 미심쩍은 햇살과 오후 두 시의 불안이 도가니 안으로 빨려듭니다 금박의 수상쩍은 자격증도 빨려듭니다 어쩌면 박사는 한눈에 나의 증상을 읽어내고 흥분제와 진정제를 묘한 비율로 섞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강단 한 알, 연민 한 술 극소량의 독 ..
비가 내려 며칠 동안 씻지 않은 얼굴이 말끔해졌다 길게 자란 수염을 자르고 싶지만 조금 더 게을러져도 좋은 계절이다 하늘도 바람도 모두 투명해지는 시간 시작만 해놓고 마무리 짓지 못한 채 덮어놓은 연애소설의 중간쯤이나 될까 지난여름의 화염을 조금만 더 그리워해도 좋은 계절이다, 라고 생각한다 후드득 떨어지는 것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몇 점 눈송이가 데리고 올 겨울을 떠올리며 첫눈 온다고 주고받을 안부를 미리 연습한다 미안하다 그대를 잊어서 미안하다 그대를 잊지 못해서 애써 밑줄을 긋지 않아도 평생 기억하는 문장이 있다 ㅡ이종형, 가을 안부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