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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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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손놓고 헤어져야 한다 여기까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름다운 이름들 사랑 또는 미움으로 꽃밭도 일궜지만 여기서부턴 누구도 함께 갈 수 없는 나라 위리안치 아득한 적소의 변방이다 혼자서 가야 하는, 편지하지 마라 전화도 사절이다 나는 여기서 오래 전부터 아무도 모르는 마지막 공부에 골몰하고 있다 잊혀지고 작아지고 이윽고 부서져 사라지는 법 이 세상 마지막 공부에 땀 흘리고 있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에도 땅이 울리는 이 마을에 지금 살고 있는 건 삼복 염천에 불같이 울어대는 매미뿐이다 짧은 생애 목놓아 울고 있는 매미의 애끊는 곡성뿐이다 ㅡ홍윤숙, 마지막 공부 : 놀이9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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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의도적으로 삶의 따뜻함을 지향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또 많은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어떤 삶도 의도적일 수 없다는, 그 우연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순간들 사소하고 쓸모 없는 기억들이 온몸 가득 쌓여 있다 조금만 흔들려도 그것들은 일렁인다 길에 비유되는 삶은 진부하다 그러나 모든 길은 삶이다 뒤돌아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한 무더기 구린내 나는 발자국들과 굳어버린 소금 기둥들, 실타래처럼 풀려나간 길들이 어두워지면 몸 속으로 기어들어온다 끝없이 걸어도 닿을 수 없다 잠들어서도 걸어가야 한다 물렁거리는 공기들이 축축해지면, 우두커니 서 있던 나무들이 일렬로 저녁 해에 끌려간다 그 순간 물집 같은 세상이 가라앉는다 그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빠져나오고, 어떤 어둠도 이 길을 되..
늦가을 바람에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빈들입니다 사람이 없는 빈들입니다 내일이 없는 빈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ㅡ고진하, 빈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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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ing를 사랑한다 죽음과 권태가 내 등을 떼밀었다 나는 아득한 땅 끝 초시간대를 꿈꾸는 마라토너 속도를 높이기 위해 소지품은 가능한 줄여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질구레한 지상의 소유권들에 발목잡혀 있는가 갇힌 이미지의 감옥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가 부패하는 냄새가 권태를 낳는다 부패하는 풍경이 죽음을 허락하게 한다 지상의 사실적 구도에 갇힌 언어는 우리들 꿈의 근육을 녹슬게 한다 무소유가 최상이다 무조건의 감동이 필수적이다 무소속의 마라토너는 金배지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는 ing를 사랑한다 천성대로 생각하며 달린다 (근래 그의 주변에는, 특히 뒤통수에서, 수런수런 일어나고 있는 물귀신들 소문적 진실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고 달린다 죽고 싶어 환장한 인간처럼 피를 말리는 시간과의 경주 가공할 식욕 끝없..
소원 따위는 없고, 빈 하늘에 부끄럽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그리움이 되지 못한 몸 여기 와 무슨 기도냐 별 아래 그냥 취해 잤다 ㅡ김원각, 남해 보리암에서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 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이곳은 참 복잡하다 시장 입구에서부터 물씬, 낯설다 포항 죽도공동어시장 고기들은 살았거나 죽었거나 아직 싱싱하다 붉은 고무 다라이에 들어 우왕좌왕 설치는 놈들은 활어라 부르고.... 좌판 위에 차곡차곡 진열된 놈들은 생선이라 부르고.... 죽도시장엔 사람 반, 고기 반으로 붐빈다 '어류'와 '인류'가 한테 몰려 쉴 새 없이 소란소란 바쁜데, 후각을 자극하는 이 파장이 참 좋다 사람들도 그 누구나 죽은 이들을 닮았으리 아무튼 나는 죽도시장에만 오면 마음이 놓인다 이것저것 속상할 틈도 없이 나도 금세 왁자지껄 섞인다 여긴 비린내 아닌 시간이 없어 그것이 참 깨끗하다 ㅡ문인수, 죽도시장 비린내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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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가 아주 급한 걸음으로 급한 걸음으로 엉금엉금 기는데 이를 보는 사자가 하 기가 차서 심술궃게 한 말씀 하시는데 "너! 토끼와 경주에서 또 졌다며" 옆으로 와 다정히도 놀리는데 거북이는 만사 귀찮다는 듯이 아주 급한 걸음으로 엉금엉금 기는데 사자는 따라오며 또 놀리는데 다정하게 붙어서 놀리는데 "야! 너 가방이나 벗고 뛰지 그랬니?" 아주 다정히도 놀리는데 거북이는 너무 화가 나서 그 자리에 멈춰 척 허리 버팀을 하고 거기 사자를 보고 한 말씀 하시는데 "야! 이년야 머리나 좀 묶고 다니지?" 한 말씀 던지고 뒤도 안 보고 가는데 엉금엉금 빨리도 가는데 이를 보고 사자가 하 기가 차서 "야! 너 정말 가방 안 벗을 거냐?" 심술궃게 또 야지를 놓는데 거북이는 제 갈 길이나 꾸벅꾸벅 가면서 "미친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