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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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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당신의 폐로 흘러가는 산소.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태울 거야. 당신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알고 있었니? 당신이 혐오하는 비계가 부드럽게 타고 있는데 내장이 연통이 되는데 피가 끓고 세상의 모든 새들이 모든 안개를 거느리고 이민을 떠나는데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 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 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 3시간 이상씩 명상을 하고, 헛것들을 보지. 매우 아름다워. 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 당신 머리에서 폭발한 것들을 사랑해. 새들이 큰 소리로 우는 아이들을 물고 갔어. 하염없이 빨래를 하다가 알게 돼. 내 외투가 기체가 되었어. 호주머니에서 내가 꺼낸 건 구름. 당신의 지팡이. 그렇군. 하염없이 노래..
매받이는 사냥을 나가기 한달 전부터 가죽장갑을 낀 손등에 나를 앉히고 낯을 익혔다 먹이를 조금씩 줄이고 사냥의 전야 나는 주려, 눈이 사납다 그는 안다 알맞게 배가 고파야 꿩을 잡는다 배가 부르면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날아 도망갈 수 없을 만큼의 힘 매받이는 안다 결국 돌아와야 하는 나의 운명과 돌아서지 못하게 하는 야성이 만나는 바로 그곳에서 꿩이 튀어오른다 ㅡ 매, 윤성학 ㅡ
1 어디까지갈수있을까 한없이흘러가다보면 나는밝은별이될수있을것같고 별이바라보는지구의불빛이될수있을것같지만 어떻게하면푸른콩으로눈떠다시푸른숨을쉴수있을까 어떻게해야고질적인꿈이자유로운꿈이될수있을까 2 어머니 어두운 뱃속에서 꿈꾸는 먼 나라의 햇빛 투명한 비명 그러나 짓밟기 잘하는 아버지의 두 발이 들어와 내 몸에 말뚝 뿌리로 박히고 나는 감긴 철사줄 같은 잠에서 깨어나려 꿈틀거렸다 아버지의 두 발바닥은 운명처럼 견고했다 나는 내 피의 튀어오르는 용수철로 싸웠다 잠의 잠 속에서도 싸우고 꿈의 꿈 속에서도 싸웠다 손이 호미가 되고 말뚝이 낫이 되었다 3 바람 불면 별들이 우루루 지상으로 쏠리고 왜 어떤 사람들은 집을 나와 밤길을 헤매고 왜 어떤 사람들은 아내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잠들었는가 왜 어느 별은 하얗게 웃으며 ..
유별나게 긴 다리를 타고난 사내는 돌아다니느라 인생을 허비했다 걷지 않고서는 사는 게 무의미했던 사내가 신었던 신발들은 추상적이 되어 길 가장자리에 버려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그 속에 흙이 채워지고 풀씨가 날아와 작은 무덤이 되어 가느다란 꽃을 피웠다 허공에 주인의 발바닥을 거꾸로 들어 올려 이곳의 행적을 기록했다 신발들은 그렇게 잊혀지곤 했다 기억이란 끔찍한 물건이다 망각되기 위해 버려진 신발들이 사실은 나를 신고 다녔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맨발은 금방 망각을 그리워한다 ㅡ박형준, 묘비명ㅡ
1 누이가 듣는 음악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남자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음악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잡초雜草 돋아나는데, 그 남자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목단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地下의 잠, 한반도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대목伐木 당한 여자女子의 반복되는 임종臨終, 병病을 돌보던 청춘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조국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자는 누구인가 일본日本인가, 일식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연애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지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ㅡ최승호, 북어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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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던 길 멈추고 꽃핀다 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한 꽃 품어 꽃핀다 내내 꽃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 딱 한번 꽃피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 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 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 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 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 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 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 꼬르륵 제 딴의 한소끔 밥꽃을 백기처럼 들어 올렸다 내리는 일이란 단지 가깝거나 무겁고 다만 짧거나 어둡다 담대한 꽃 냄새 방금 꽃핀 저 꽃 아직 뜨겁다 피는 꽃이다! 이제 피었으니 가던 길마저 갈 수 있겠다 ㅡ정끝별, 꽃이 피는 시간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