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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 잡고 매화꽃 보러 간 줄 알아라 ㅡ김용택, 봄날ㅡ
나의 가슴이 요정도로만 떨려서는 아무것도 흔들 수 없지만 저렇게 멀리 있는, 저녁빛 받는 蓮잎이라든가 어둠에 박혀오는 별이라든가 하는 건 떨게 할 수 있으니 내려가는 물소리를 붙잡고서 같이 집이나 한채 짓자고 앉아 있는 밤입니다 떨림 속에 집이 한 채 앉으면 시라고 해야 할지 사원이라 해야 할지 꽃이라 해야 할지 아님 당신이라 해야 할지 여전히 앉아 있을 뿐입니다 나의 가슴이 이렇게 떨리지만 떨게 할 수 있는 것은 멀고 멀군요 이 떨림이 멈추기 전에 그 속에 집을 한 채 앉히는 일이 내 평생의 일인 줄 누가 알까요 ㅡ장석남, 오막살이 집 한 채ㅡ
여태껏 멍했다 위아래 마디마다 슬펐다 오늘 또 쓰라리다 마음에 구멍이 났다 비어서 텅 비어서 제 몸속에 바람을 지닌 너 갈지 자 푸른 곡을 붙여 별의별 소리로 울었다 ㅡ이윤, 대나무
날이 날마다 오가는 길에 너만 있어 숱한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 너만 있어 어항 속 한 마리 운명의 금붕어처럼 너를 숨쉬고 나는 살아간다 ㅡ김용호, 너를 숨쉬고ㅡ
썰물의 드넓은 뻘 휘어진 물길을 타고 흘러나오는 핏덩어리들 핏덩어리 같은 숨소리들 우리는 먼 곳에서 왔고 오늘밤엔 더 먼 곳으로 가야하지만 뻘 위의 널 자국, 파헤쳐진 검은 흙들에게 새꼬막, 낙지, 짱뚱어, 같은 것들에게 용서를 빌듯 서 있어요 급히 달려가다 쓱 한번 뒤돌아보는, 입을 앙 다문 바람 속에 철새들 자욱이 날아오르고 울음도 없이 사라지고 풍랑과 제사를 기억하며 흩어지는 집들 끊임없이 삐걱대는 문들 어딘가요? 무너지는 갈대밭 속인가요? 뻘을 바라보는 당신 눈 속인가요? 모닥불 타는 연기가 나요 추운 혼들 부르는 그 냄새를 맡으면 아, 거짓말을 거짓말 같은 고백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 사람으로 와 기쁘다고 계속 아프겠다고 ㅡ전동균, 떨어지는 해가 잠시 멈출 때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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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일제히 고흐가 그린 헌 구두 앞에서 발을 멈춘다 구두가 긴장한다 누군가가 구두의 대변인인 것처럼 말한다 ‘이 구두는 고흐 자신인데 한 짝은 생활고에 시달린 슬픈 얼굴이고 다른 한 짝은 고난을 극복한 후의 얼굴’ 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헌 구두가 고흐 같아서 반갑다 그러나 구두는 일체 말이 없다 말은 않지만 많은 말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다 끝내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구두는 구두다 왜 새 구두를 그리지 않았을까 새 구두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새 구두는 사람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의 무게를 모른다 새 구두는 상처가 없기 때문에 아직 사람의 아픔을 모른다 결국 찾아낸 것은 구두의 아픔이 아니라 사람의 아픔이다 구두가 서러워한다 ㅡ이생진, 구두 한 켤레ㅡ
분명했네 분간할 수 없었던 티끌이 점점, 사람이었네 별만큼 보이다가 달이었네 달보드레한 눈빛 건넬 겨를 없이 차오르는 숨 불어줄 틈 없이 순간이었네 달이었던 사람 티끌로 멀어졌네 두근거리던 심장, 솜털 잠시 쏠렸던가 마주 오는 사람 아니라 이미 지나간 사람이었네 오늘 아침 아니라 벌써 어제 아침이었네 달이었다가 별이었다가 다시 티끌이 되어버린 찰나 같은 ㅡ안성덕, 마주오던 사람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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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달음에 달려가 입구에 세워진 푯말을 보았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버리십시오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늙은 개도 그것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버려져야 했다 기껏해야 안팎이 뒤집힌 잠일 뿐이야 저 잠도 칼로 둘러싸여 있어 돌부리를 걷어차면서 다다를 수 없다는 절망도 길을 주었다 우리는 벽 앞으로 되돌아왔다 아주 잠깐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늙은 개를 쓰다듬으며 나는 흰 벽에 빛이 가득한 창문을 그렸다 너를 잃어야 하는 천국이라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ㅡ안희연, 면벽의 유령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