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시 (920)
오자기일기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RZHzm/btqPldjB1jY/eCgy5BA7P0lHTK2QbYw710/img.jpg)
나는 안다 이웃집 옥탑방에 걸려 있는 양말 한 짝이 바람 불어 좋은 날 하릴없이 펄럭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누군가가 안쓰러워진 양말짝에 기러기표 부표를 달아주면 구만리장천으로 날려 버릴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것을 ㅡ서정춘, 기러기표ㅡ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y3K5R/btqPaVo2xzA/EOdUC86rMOmFDqDxeR6rl1/img.jpg)
뿔은 언제 뿔이 솟나 이랴, 이랴, 워, 워, 몸이 전부 의성어인 아버지는 소였다 그 둥근, 눈을 껌벅이며 무릎이 툭 꺾일 때 보았다 뿔은 비로소 날 향했다 ㅡ이토록, 쇠뿔ㅡ
물새가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것일까 손에 쥐니 참 따듯하다 어미 새가 품던 알처럼 바다가 갈고 다듬어 놓은 작고 까만 돌 새알 ㅡ전병호, 몽돌ㅡ
여수행 전라선 마지막 열차 자정을 앞둔 밤 열차는 우울하다 듬성듬성 앉은 사람들을 지나 자리를 찾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고 긴 숨을 내뿜고 나면 일정한 간격으로 덜그럭거리며 출렁이는 리듬을 따라 차창 밖으로 불빛이 흘러간다 강을 건너 한참을 달려도 끝없이 이어지는 야경들, 틈새가 없다 문득 창밖으로 어디서 본 듯한 그러나 낯선 얼굴이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인가 곧 물을 것만 같은데 정작 말이 없다 흘러간 불빛만큼이나 아득한 지난날들에서 누군가를 찾는데 없다 나도 그도 아무도 없다 문득 대전역에서 뜀박질하며 뜨거운 우동 국물이 먹고 싶다 옛날처럼 ㅡ곽효환, 야간열차에서 만난 사람ㅡ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n8SHf/btqOhvkKjFF/cbrlAPvb512QoO8A4LQhv1/img.jpg)
대구뽈떼기찜집에 갔는데 찜만 나오고 김치가 없었다 김치가 아예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소주를 한 병만 먹기로 하고 두 병을 먹었다 분명히 쌀, 김치는 국내산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소주를 두 병이나 먹게 했다 대구뽈떼기찜을 먹으며 나는 기다림이 기다림으로만 끝나는 이번 겨울엔 꼭 청령포를 한 번 다녀오리라 생각했다 남들은 다 불그스름한 단풍이 오는데 어째 내게 오는 소식은 잠잠하다 잠잠, 잠잠한 것 그러나 나는 간혹 잠잠한 게 좋았다 궁핍한 자는 오래 슬프리라 생각했다 오래된 묵은지의 시큼함이 목까지 차오른다 ㅡ성선경, 당나귀에게서 귀를 빼면 뭐가 남나ㅡ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d3hfr3/btqNQ33yhBh/fXTuGV32KVklpSk3jiILGK/img.jpg)
한 때 나는 나밖에 몰랐다 한 때 나는 나밖에 없었다 나 밖의 모두가 떠나가고 마침내 한 때도 가고 비로소 보았다 나를 나는 나, 밖에 있었다 ㅡ박제영, 섬ㅡ
천천히 걸어도 빠르게 닿아버리는 목적지는 싫다 허기진 밤길 오래 걸어 행복도 열정도 제 몫의 것만 제 품속에 거두며 허공에 온몸을 담그고 서 있는 나무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깊은 물은 조용히 흐르는 법이다 이미 많은 걸 깨달아 단순해진 숲에 비 내리고 까맣게 바람 분다 새들은 길을 잃지 않는다 ㅡ권경인, 원근법ㅡ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TRHMG/btqNaFO0DOg/mSo1L6ErnGqp5Erx0ZH331/img.jpg)
밤늦은 시간 누가 홀로 공원을 가로지른다 어렵게 한 세계를 놓고 떠나는 자의 그림자가 뒤에서 한없이 자유롭다 ㅡ이시영, 가로등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