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시 (920)
오자기일기
갯지렁이야 너는 망둥이 땜에 죽는다 망둥이야 너는 갯지렁이 땜에 죽는다 낚시꾼이여 미안하하지 마라 우린 잘 문다 희망의 그림자 속에서 훌쩍 뛰어오를 줄 아는 미련 없이 한 생을 던져 버릴 줄 아는 족속이다 기억력이 삼 초라고 물렸다 떨어져 다시 문다고 후후후 웃지 마라 우린 동족의 살점을 미끼로 써도 빈 바늘을 던져도 물어버린다 낚시꾼이여 미안하다 그대가 한 세상 잊고 낚으려는 세월을 기다림이 맛이라는 그 맛의 기다림을 그대가 낚기 전에 먼저 물어버려 덥석 그대를 물어 버려 ㅡ함민복, 망둥이를 낚다가ㅡ
지금 있다 내 가방 속에는 생수 한 병 노바스크 한 알과 새소리 두 알 읽다 만 가을 하늘 몇 페이지 봉인된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에튀드 이것만으로도 나의 하루는 충분하다 두 손에 희망을 정중히 들고 神의 앞으로! ㅡ김성춘, 희망의 정석ㅡ
보소! 부처님요, 정말 그럴낑교? 내 소원쫌 안 들어줄랑기요? 내가 을마나 빌었능교? 내 승질머리 더러븐 거 알제? 이번에도 안 들어주먼 부처고 나발이고 다 불싸질러불끼고마! 고년 어서 맘 돌리게 해주꼬마! 나무관샘 관샘! ㅡ임보, 불공ㅡ
나 오랜 옛날에 나무인 적 있었다 다른 세상의 햇살이 지나가고 치마자락을 흔들어대는 바람이 불던 날 나 그때 나무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제야 그 아련한 추억들이 수런인다 우주 낯선 강 멀리 키는 하늘에 닿아 수도 없이 돋아나오는 나뭇잎들이 되면서 나는 비로서 아주 먼 그 옛날 내가 귀여운 애기잎사귀들을 흔들어주면서 바람으로 돌아오는 나를 보았었다, 그때 나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서야 아련한 추억들이 살아난다 파란 바람이 불어오니라 불어가니라 알려고 하는 자에게만 비밀을 알려주고 제 나뭇가지들을 흔들어주어라 나 옛날에 바람이었던 때가 즐거웠다 그때가 아름다운 때였음을 알게 되었다 ㅡ고형렬, 바람 나뭇잎ㅡ
외롭지 않으려고 길들은 우체국을 세워 놓았다 누군가가 배달해 놓은 가을이 우체국 앞에 머물 때 사람들은 저마다 수신인이 되어 가을을 받는다 우체통에 쌓이는 가을 엽서 머묾이 아름다운 발목들 은행나무 노란 그늘이 우체국을 물들이고 더운 마음에 굽혀 노랗거나 붉어진 시간들 춥지 않으려고 우체통이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우체통마다 나비처럼 떨어지는 엽서들 지상의 가장 더운 어휘들이 살을 맞댄다 가을의 말이 은행잎처럼 쌓이는 가을 엽서에는 주소가 없다 ㅡ이기철, 가을우체국ㅡ
먼 바다에는 늘 음모가 있다 음모는 대륙을 도모하는 것이다 쓰러뜨리는 것은 바람이고 쓸어버리는 것은 비다 쓸려오는 가을에 쓰러진 개집을 다시 잘 쓰러지게 고쳐놓고 산들바람에 하늘거리는 저 허리꺽인 코스모스를 증오하자 바이러스를 증오하는가 그대 그것은 음모가 아니다 가을야구의 전광판 옆 독사를 보라 그들은 어느틈엔가 그대를 칭칭 휘감고 있다 도시의 밤거리 어둠을 밝히는척 빛을내는 바벨탑 저 썸듯한 괴물, 리워야단을 보라 거기 붙어 죽어가는 시체들은 영혼까지 죽어 너풀거린다 안락과 욕망을 누런 종이쪽지로 바꿔주는 곳 그들의 파라다이스 유행의나라, 광고의 나라 아름다운 나라 무너진 가을너머로 다시 눈보라가 밀려오면 음모를 지우고 맞을 일이다 은밀한 곳에서 움튼 터럭 "음모"를 밀어내고 알몸으로 서자 알몸으로 ..
고도를 기다리며 그래 고도 네가 너를 기다린다 나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기다림이 기다림의 육화를 기다린다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이미 무언가 경계가 무너지고 너의 울음은 하늘 끝까지 너무 높이 치솟아, 보이지 않는다 비극의 황홀, 의 지루함과 장난 그래 고도 길을 잃고 어설프게 등장한 일그러진 웃음의 하느님 그래 고도 울지 마라 길은 항상 먼저 보이지 않고 돌아보면 옛날 길이다 ㅡ김정환, 고도를 기다리며
금요일 오후 파고다 공원 십층 석탑 밑 정년퇴직한 의자왕이 돌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파고드는 바람을 날짜 지난 신문으로 가리며 연신 굽신거리는 비둘기들의 호위를 그저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탑의 꼭대기가 서서히 왕의 어깨를 누르려고 한다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온다 해도 눈도 꿈쩍 안 하던 왕이 어깨를 움직여 햇빛 쪽으로 돌아앉는다 감기에 걸린 경순왕은 몇 번 뒤채더니 조용해졌고 소주에 찌들은 이성계는 벌써 길게 누워 버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는 알고 있다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서로 통성명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그저 적당히 떨어져 앉아 무심한 척 하는 것이 퇴직한 왕의 신분에 어울린다는 것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