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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대놓고 색기 부리던 단풍 땅에 내려 흙빛 되었다 개울에 들어간 녀석들은 찬 물빛 되었다 더 이상 뜨거운 눈물이 없어도 될 것 같다 눈 내리기 직전 단색의 하늘, 잎을 벗어버린 나무들, 곡식 거둬들인 빈 들판, 마음보다 몸 쪽이 먼저 속을 비우는구나 산책길에서는 서리꽃 정교한 수정 조각들이 저녁 잡목 숲을 훤하게 만들고 있겠지 이제 곧 이름 아는 새들이 눈의 흰 살결 속을 날 것이다 이 세상에 눈물보다 밝은 것이 더러 남아 있어야 마감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견딜 만한 한 생애가 그려 지지 않겠는가? ㅡ황동규, 또다시 겨울문턱에서ㅡ
사람들은 히말라야를 꿈꾼다 설산 갠지스강의 발원 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생의 꽃봉우리로 오른다 그러나 그 산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많은 짐을 지고 이 고생이다 ㅡ이성선, 티벳에서ㅡ
바뀐 주소로 누군가 자꾸만 편지를 보낸다 이 나라에는 벌써 가을이 돌아서버렸다 매일 날짜 하나씩 까먹고도 지구가 돌아간다 돌고 돌아서 내가 나에게 다시 도착한다 지금 광장에서 춤추는 소녀는 어제 왔지만 나는 내일 소녀를 만날 것이다 만년 전 달려오던 별빛이 내 머리 위를 통과해갔다 그래서 오늘은 너와 헤어졌다 검은 재를 뒤집어쓰고 우리는 매일 무릎이 까진다 나에게 도착한 미래가 어제 아프다고 전화를 했다 그래, 이제 이 나라에서 입력한 날짜들을 모두 변경하기로 하자 휙휙, 나무들이 날아가고 섬들이 날아가고, 낙엽이 빗방울처럼 날아가고 날아가고, 날아가는 것들 뒤바뀐 날짜를 버리기로 하자 버리고 버려서 가슴속엔 새로운 정부를 모든 경계선을 지워가며 ㅡ이설야, 날짜변경선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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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어둠이 밤을 내리 찍고 있다 허공에 걸려있는 칠흑의 도끼 밤은 비명을 치며 깨어지고 빛나는 적막이 눈을 말똥처럼 뜨고 있다 ㅡ홍해리, 새벽 세 시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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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별처럼 많은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모래 반짝이는 건 반짝이는 거고 고독한 건 고독한 거지만 그대 별의 반짝이는 살 속으로 걸어들어가 "나는 반짝인다"고 노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대의 육체가 사막위에 떠 있는 거대한 밤이 되고 모래가 되고 모래의 살에 부는 바람이 될 때까지 자기의 거짓을 사랑하는 법을 연습해야지 자기의 거짓이 안 보일 때까지 ㅡ정현종, 그대는 별인가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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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덕희 시인 경북 군위에서 태어나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2009년 《아동문학평론》에 동시 「감자 심기」 외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주관 중소출판사 출판지원금 수혜로 『호랑이는 풀을 안 좋아해』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2020년 《시와 사람》으로 시 등단하였습니다. siena-go@daum.net 고래를 좋아하는 하늘과 새를 좋아하는 바다는 날마다 줄넘기를 해요 하늘은 바다에서 파랗게 바다는 하늘에서 파랗게 서로 줄넘기로 닮아가요 -「수평선」전문
가을에 와 닿는 일은 저녁 포구에 빈 배를 묶고 담배 하나 피워 무는 일 비바람의 한철 빠져나간 자리 찢어진 그물을 그러매는 일 부두에 흩어진 비늘 그 눈물의 무늬들을 헹구며 무릎 일으켜 사는 게 어쩌면 海菊떨기 피었다 지는 일과 같다고 밤바다를 따라 입을 닫는 일 태풍 지나간 바닷가 언덕에 칠십 먹은 가을이 오는 일은 ㅡ오성일, 저녁 포구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