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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이제 일어설까 일어서 떠나볼까 새벽 바람이 도착하니 어둠은 슬며시 물러가는구나 모든 잠의 옷섶에서 삐져나온 꿈들을 벚나무 흐린 그림자를 핥으며 뒤숲으로 빨리 사라진다 이제 일어설까 일어서 떠나 볼까 나의 허약한 아버지가 나를 부르고 있으니 가장 작은 지상의 것들이 나를 부르고 있으니 지상에서 가장 작은 불을 켤 수밖에 없는 이를 위하여 눈물 하나가 끌고 가는 눈물을 위하여 하루치 그림자밖에 없는 이를 위하여 어디서 울고 있는 애인들을 위하여 어디서 웃고 있는 순간 입들을 위하여 여기 추억은 추억의 손을 쓰다듬으며 놓지 않은 곳 오래도록 지구를 돌아다니고 있는 구름이 어슬렁어슬렁 안개의 이불을 꿰매고 있는 곳 이제 일어설까 일어서 떠나볼까 모든 길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숨을 헐떡이고 있다 그대여 길이 될 ..
인다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술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 한다 - 화엄경 작은 연어 한 마리도 한 생을 돌아오면서 안답니다 작은 철새 한 마리도 창공을 넘어오면서 안답니다 지구가 끝도 없이 크고 무한정한 게 아니라는 것을 한 바퀴 크게 돌고 보면 이리도 작고 여린 푸른 별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구 마을 저편에서 그대가 울면 내가 웁니다 누군가 등불 하나 켜면 내 앞길도 환해집니다 내가 많이 갖고 쓰면 저리 굶주려 쓰러지고 나 하나 바로 살면 시든 희망이 살아납니다 인생이 참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참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한때는 씩씩했는데, 자신만만했는데, 내가 ..
인간이 내가 인간이 아닌 나무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싶을 때 나무는 고요히 춤을 춘다 모르는 이들은 만행 중인 바람이 나무의 심연을 헤적인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나무는 제 앞에 선 인간에게 더덕꽃 향기 짙은 제 몸의 음악을 고요히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나무는 춤을 출 때 잎사귀 하나하나 다른 춤의 스텝을 밟는다 인간이 당신이 나뭇잎 속으로 들어와 춤을 출 때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그러다가 홀연 당신 또한 온몸에 푸른 실핏줄이 퍼져나간 은빛 이파리가 된다 인간이 아닌 나무가 인간인 내게 시를 읽어주고 싶을 때 나무는 고요히 춤을 춘다 세월이 흘러 나무가 땅에 누우면 당신도 나란히 나무 곁에 누워 눈보라가 되거나 한 소쿠리 비비새 울음이 된다 먹기와집 마당을 뒤덮은 채송화 꽃밭이 된다 ㅡ곽재구, 나무ㅡ
"이것도 몰라?" 수학시험 40점 맞았다고 우리 엄마 열 받았다 부엌에서 오이를 가져오더니 다섯 토막으로 자른다 "이것중에 한 개가 분수로는 뭐야?" "오이지 뭐야" 내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머리에 콩 알밤을 먹인다 "아이구, 머리야!" 내 머리가 아픈데 엄마는 엄마 머리가 아프다고 엄살이다 ㅡ김철순, 수학은 정말 싫어ㅡ
자유에게 자세를 가르쳐주자 바다를 본 적이 없는데도 자유가 첨벙거린다 발라드의 속도로 가짜처럼 맑게 넘어지는 자유 바람이 자유를 밀어내고 곧게 서려고 하지만 느낌표를 그리기 전에 느껴지는 것들과 내가 가기 전에 새가 먼저 와주었던 일들 수많은 순간 순간 자유가 몸을 일으켜 바다 쪽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저기 먼 돛단배에게 주었다 돛단배는 가로를 알고 있다는 듯이 언제나 수평선 쪽으로 더 가버리는 것 마음과 몸이 멀어서 하늘이 높다 ㅡ유이우,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ㅡ
화양연화 속의 그녀 남자들은 잘록한 허리에 빠지지만 나는 '장만옥'이라는 이름에 홀린다 '장'이 품은 장도의 비장함과 '만'에 묻은 중국식 야끼만두 냄새 '옥'이라는 한국식 촌스러움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그녀의 이름에 혹하는 건 그 적절한 '만'과 '옥'의 이미지에 있다 가령 '옥'이 강화된 '옥분'이나 '옥순'이가이거나 '옥'의 이미지가 뻗어나간 '순옥'이나 '분옥'이가 아닌 단단한 차이나식 칼라의 '만'에 대해 그 滿 수위를 눈앞에 찰랑거리게 하는 화양연화 속의 그녀 뒷모습 오래 훔쳐보는 것은 장만옥이라는 그 적절한 결함에 있다 ㅡ천수호, 장만옥이라는 이름에 대하여ㅡ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ㅡ서정주, 冬天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