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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밤마다 홀로 행간으로 들어가 새벽을 여는 사람아 아침이면 그대가 부어주는 노래가 이슬처럼 정수리를 적셨나이다 일찌기 나는 노래를 모르는 짐승이었고 새벽이슬에 젖지 못하는 돌이었으니 어찌 사람을 알 수 있었으리오 세월이 구비쳐 흐르는 동안 그대가 보내준 시와 시어들 사이에서 팍팍한 꽃 피어났나니 그대 영혼의 입김 때문이리라 비로소 사막에서도 쓰러지지 않을 쌍봉낙타의 두 혹을 가지게 되었으니 시와 사람이라 그대 밤마다 불 밝혀 시를 찾아 헤맨 노고를 우정이라 부르리이까 나는 우정을 빚진 자니 그 빚 어이 다 갚으리오 사람이 시가 되고 시가 세상 가득 채워지는 날까지 그대와 시를 노래하고 싶을 뿐이라네 -.작작선생에 바치는 헌사(獻辭). 2022.3.11.-
사람을 찾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사는 곳도 모르죠 지난 겨울 철새따라 갔다는 말도 있고요 눈썹 짙게 칠하고 눈사람 되었을지도 모르죠 그리움으로 가슴이 더워지면 정말 눈이 내릴까요 눈이 내려도 그 눈 다시 녹을테니 내 그리움 그칠 날 없겠네요 현상수배 하려고 전단지를 만들어요 느낌으로 윤곽잡고 기억으로 색칠했더니 창백한 푸른 얼굴 교수대 높이 매달리죠 댕그랑 죽음을 데려와도 그리움 그치지 않으니 이를 어쩌죠 사람을 찾을게 아니었나 봐요 서쪽하늘 바람을 그려야 했을까요 마음속 허한 담벼락에 내 그리움 새길 수 있다면 모든 부재하는 것들을 허한 웃음으로 보낼 수 있을런지요
백농 최규동선생에 대한 소고(小考) -백농선생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백종운 우리 가천면에는 백농 최규동선생의 생가가 있다 가천에 태어나서 자라신 지역민들도 어릴적 높다란 담장으로 길게 둘러쳐진 생가를 보면서 저 곳이 최박사집이라는 사실 외에 아는 것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나이가 어느 정도 지난 후에서야 백농 선생님이 서울대 초대총장을 지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누군가의 구전을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 후 세월이 유수같이 지난 어느 날 선생의 생가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세월의 무거운 눌림으로 담장은 허물어질 듯 퇴색되었고 기와지붕이 간신히 빗물을 받아내며 쇠락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 고독하고 쓸쓸한 노인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생가의 모습이 그렇게 흉물이 되어가는..
오늘 같이 추운날 바람불면 얼굴에 얼음이 닿는듯 씨렁씨렁 한데 집에서 마트가는 금봉길 십리길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마트에 들어서자 콜라 사이다 빵 과자 눈으로 먼저 먹고 오백원짜리 소시지 하나 사서 들고 돌아오는 길 흰 눈 내려 쌓이는데 등 뒤로 남겨지는 눈 발자국 미련없이 모든 길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황량한 눈밭길 걸어가는 머리속에 새의 둥지가 있어 언제나 새소리로 웃는 짝짝이 양말 신기를 좋아하는 키 작고 둥글납작한 별 하나가 여기 있다
해질 무렵 축사에는 저녁 만찬소리 부산스럽다 우리옆 한켠에 화덕난로가 있고 장작더미가 쌓여 있다 그 중 한 나무등걸에 검은고양이 엎드려 몽상에 잠겨 있다 주인은 너를 네로라 불렀다 너는 눈을 감고 너를 보고 있고 나는 눈을 뜨고 너를 보고 있다 서로 눈이 마주치는 짪은 순간 서로의 세계가 충돌한다 너의 우주에서는 누가 고양이방울을 매고 있는지 누가 구운 생선을 훔쳐 먹고 있는지 누가 부뚜막을 먼저 올라갔는지 알고 싶다 소는 남은 사료 한 알까지 핥으며 생각을 지운다 오로지 먹이와 새끼로 이루어진 세계에는 사치는 없다 너와 소의 우주는 충돌하지 않고 자기속도로 일정한 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네로야, 이리와 바" 억지스럽게라도 약간의 의미를 가져보려는 의도에서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이런 행동으로 이를테..
해를 보아라 해바라기들아 해를 보는것은 마음속 지긋이 바라보는것 해는 슬픔이 깊은 곳에서 뜬다 마지막 공룡이 보았던 그 겨울 밤하늘엔 별이 보이지 않았고 이후 해는 다시 뜨지 않았다 새들이 공중에서 비처럼 뚝뚝 떨어졌다 표독한 고양이가 가면을 쓰고 사냥을 하고 들쥐는 두려움에 땅속으로 숨어버려 초원에는 허한 아우성과 풀숲에 버려진 가면의 무연한 소리만 바람에 떠다닌다 해를 보아라 해바라기들아 해를 보는것은 핏빛 상흔 지긋이 바라보는것 해는 어둠이 깊은 곳에서 뜬다
무우를 자르려고 칼을 들었다 칼날은 시퍼렇게 서 있다 이제 무우의 몸통을 지나는 일만 남았다 길은 여러갈래로 나있다 모두 끝은 검은 산기슭에 연해 있다 그 중 한 길을 택해 걸으면 다른 길은 길이 아니다 사바나 초원에 바나나 나무가 있다 배고픈 원숭이와 배고픈 사자가 있다 한 원숭이가 바나나를 따먹다가 사자에게 먹혔다 바나나를 포기한 다른 원숭이는 굶어 죽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원숭이는 그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 죽었다 칼날을 스친 빛이 어른거린다 푸른 머리채 밑으로 흰 몸통이 몇 안되는 수염을 달고 있었다 머리는 하늘을 쫒아 푸르고 흰 몸은 땅에 묻었다 무우를 다시 냉장고 구석에 밀어 넣고 말았다 ㅡ결단, 백난작ㅡ